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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주택가의 옹골찬 박물관
[박찬희의 박물관 여행] 주택가의 옹골찬 박물관
  • 박찬희
  • 승인 2020.11.10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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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의 박물관 여행_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거칠거칠한 시멘트 벽돌 그대로 노출시켜
위안부 피해자들이 살아온 고단한 인생 표현

추모 공간은 넓지 않고 소박하며 엄숙하게
피해자들이 걸어왔던 일생 생각해보도록 구성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외경. ⓒ박찬희

사람처럼 박물관의 인상도 박물관마다 조금씩 다르다. 인상은 박물관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박물관이 만들고 가꾸어온 역사와 관련이 깊다. 박물관 가운데 작지만 옹골차다는 인상을 받는 곳이 있다. 지난 2012년에 문을 연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그런 곳이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서울 마포구 성미산 자락 주택가에 자리 잡았다. 큰길에서 들어가 있고 박물관 건물도 2층 일반 주택을 리모델링했다. 이곳이 박물관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된 곳은 아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박물관은 주택가가 아니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독립공원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곳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시설과 기념물이 빼곡히 들어선 곳이다. 독립의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는 곳으로 이만한 곳도 드물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역사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만들어졌다. 이듬해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이후 2004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교육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위원회’가 결성됐다. 
당시 정대협에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지으려고 하자 서울시에서는 서대문 독립공원에 부지를 제공했다. 이 사실을 안 독립유공자단체에서 박물관의 건립을 반대했다. 이곳에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것이고,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일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계속된 반대로 결국 박물관은 이곳에 들어서지 못했다. 이 과정은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독립공원이라는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일반 주택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최종적으로 마포구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이 박물관으로 선택됐다. 박물관은 리모델링하는 일이 신축하는 것보다 어렵다. 박물관은 유물의 안전한 보관과 전시를 목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일반적인 건물의 구조와 상당히 다르다. 그나마 사무용 건물이라면 내부 공간을 활용하기가 수월하지만 일반 주택은 이미 고정된 방과 방으로 구성돼 내부 구조를 대폭 바꾸기 어렵다. 때문에 리모델링을 맡은 건축가는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고, 큐레이터 역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작은 공간에 펼쳐내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작은 언덕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은 표지판이 아니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주위의 주택과 달리 담과 건물이 검은 벽돌로 둘러졌다. 이 벽돌은 박물관을 견고하고 영속적인 기념물로 만든다. 견고한 느낌을 잠시 환기시키는 장치는 담에 설치된 ‘참여+약속의 공간’이다. 관람객이 박물관을 보고 느낀 소감을 적은 노란 나비판을 걸어두는 곳이다. 박물관을 보러 오는 관람객들은 박물관으로 들어오기 전 이 건물과 나비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단단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검은 벽돌로 이뤄진 어두운 공간을 만난다. 이곳은 어두운 과거의 진실을 찾으러 가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실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박물관 뒤로 나간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가자마자 뜻밖의 장면이 펼쳐진다. 건물과 담 사이로 작은 길이 났다. 버려질 뻔한 공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 재탄생시킨 ‘쇄석길’이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포성을 들으며 관람객들은 돌이 깔린 길을 저벅저벅 걷는다. 왼쪽 벽에는 공포에 질렸을 소녀들이 걷고 오른쪽 벽에는 할머니들의 부조상이 두꺼운 벽을 깨고 진실을 말하려는 것 같다. 이 길을 걷는다는 건 그 시대 속으로, 또한 공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관람객은 짧게나마 그 시대의 분위기와 당사자들의 심정을 느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한걸음 다가간다. 이 분위기는 어둡고 으스스한 지하전시관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당사자들이 느꼈을 절망을 담았다.
지하전시관은 ‘호소의 벽’으로 이어진다. 지하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면이 ‘호소의 벽’으로 거칠거칠한 시멘트 벽돌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거칠거칠한 벽은 그녀들이 살아왔을 고단한 인생처럼 보인다. 그 고단함을 뚫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진실이 솟아 나왔다. 시멘트 벽돌이지만 돌이 갖는 물성을 잘 포착해 그곳에 글을 새기고 사진을 붙여 묘지명처럼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말들이 더욱 깊게 다가온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추모관의 모습. ⓒ박찬희

위안부 문제 집중해 전시
2층부터 본격적인 전시 공간이다. 이곳의 구조는 독특하다. 2층의 마루 부분을 뻥 뚫어 1층이 훤히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좁은 공간이 덜 좁아 보이고 오히려 역동적으로 보인다. 구멍 난 부분 양쪽에 거대한 벽을 세웠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검은 벽 같지만 이것은 기부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채워진 기부자의 벽이다. 기부자 명단은 이곳의 역사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한편 이 벽은 또 다른 전시 공간을 만드는 벽의 역할도 했다. 
2층 전시실은 무척 좁아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제한된다. 그렇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무엇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박물관에서는 역사관, 운동사관, 생애관으로 구성해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전시했다. 전시관 가운데 특히 생애관이 인상적이다. 생애관1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됐다. 이 전시물은 그녀들이 집합적인 명사가 아니라 개별적인 고유명사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일깨운다. 생애관2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작은 전시가 열린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가장 파격적인 곳은 추모관이다. 2층 베란다에 검은 벽돌을 이용해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 벽돌에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진을 붙였는데, 사진은 없고 이름만 있는 벽돌도 있다. 관람객이 추모의 꽃을 벽돌 사이에 놓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벽돌 사이로 들어오는 빛으로 이곳은 더욱 은은하고 엄숙해진다. 넓지 않고 소박하지만 피해자들이 걸어왔던 일생을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울림이 큰 곳이다. 근현대사 박물관과 기념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추모인데, 이곳은 박물관에서의 추모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밖에 1층과 뜰의 지하에는 상설관과 기획전시관이 있다. 이곳의 주제는 세계의 분쟁과 여성폭력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바라보는 시야를 세계로 확장했다. 아프리카, 동유럽, 한국군이 파병된 베트남 등 전쟁과 내전이 일어난 곳에서 발생한 전시 성폭력 문제를 다뤘다. 또한 세계 아이들이 겪은 전쟁의 피해를 전시했다. 이곳에서는 전쟁을 승리와 패배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이 입는 피해의 실상과 평화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출입문부터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문까지 각 공간들이 짜임새 있게 연결됐다. 작은 공간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한 노력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 흐름 속에서 각 공간들은 속 깊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런 과정 끝에 옹골찬 박물관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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