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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작가 큐레이션 2] 물질행위를 통한 감정의 용해
[신진 작가 큐레이션 2] 물질행위를 통한 감정의 용해
  • 하혜린
  • 승인 2020.11.27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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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리, 「우연의 지평선」, 2019,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가변설치 450 x 520 x 230cm.

보라리는 실을 활용해 공간을 뜨개질한다. 관람자들은 실들이 엮인 공간을 유영하며 각자만의 체험을 획득한다. 텅 비었던 공간은 사람들의 무수한 경험들로 채워지며, 다양한 몸짓들이 교차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이 뜨개질 행위의 모티프다. 보라리는 형태 없는 감정에 집착하는 인간의 모습을 물질화하고자 한다. 그는 감정의 물질화를 통해 지우고, 비워내는 행위의 시작이 예고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실들의 교차로 이뤄지는 변주를 체험해보자. 연약한 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가까움과 멀어짐을 경험할 수 있다. 공간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환기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는 것. 누구나 경험하는 불안은 공간 속에서 용해될 수 있다. 
 

 


“물질행위를 통한 감정의 용해”

 

 

[신진 작가 큐레이션 2] 보라리 인터뷰

- 작가에게 ‘뜨개질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저에게 뜨개질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먼저 작업의 측면에서 뜨개질이란 ‘2차원적인 선을 3차원에 구현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도화지에 선을 그리듯, 공간 속에 선을 만들어 드로잉 합니다. 저는 제 작품을 시간으로 조각하는 공간 드로잉이라고 표현합니다. 시간을 공간적으로 조각하게 하는 방법론이 곧 뜨개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뜨개질하는 행위의 또 다른 의미는 ‘형태가 없는 감정들을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특히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불안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져가기 마련인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시간성이 함축된 뜨개질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실 색깔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저에게 실은 화선지의 먹 선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됩니다. 이야기의 시작점이죠. 

저는 ‘빨간 망토’라는 동화 때문에 빨간 실을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늑대에게서 슬기롭게 자신을 보호하던 빨간 망토 소녀의 모습에서 저는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후 빨간 실은 저에게 강조, 변주, 혹은 조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사용됩니다. 
 

보라리, 「주목,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가변설치 220 x 170 x 290 cm, 2013.
보라리, 「주목」,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가변설치 220 x 170 x 290 cm, 2013.

 

- ‘체험’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 같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관람하며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저는 각자의 기억을 간직한 관람자들이 제 작품을 통해 새로운 체험을 하기를 바랍니다. 각각의 기억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제 작품을 통해 새로운 기억이 첨가되면서 또 다른 경험이 생겨납니다. 그 부분은 제가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영역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전시를 통해 관람자를 직접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제 작품이 가볍고 연약한 실임에도 불구하고 반복과 엮임을 통해 관람자의 새로운 동선을 만들고, 이들을 움직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실이기 때문에 그냥 치고 지나가거나 부딪치거나 해도 문제가 없을 텐데 관람자들은 실 하나도 피해 공간을 거닙니다. 거대한 콘크리트가 아니어도 연약한 실 하나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 멀어질 수도 있고, 혹은 더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 비물질적인 공간을 뜨개질하다고 볼 수 있는데, 공간에 따라 작품의 형태도 바뀐다고 할 수 있는지.

네, 제 작품에 있어 공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공간 전체를 마치 흰 캔버스처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전시장은 시멘트로 만든 사각의 공간이지만, 각 공간은 구조와 위치, 그리고 공간의 역사에 따라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공간 자체는 멈춰있고 변함이 없지만, 그 공간 속 시간과 이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습니다. 그 다양한 이야기를 선이라는 매개로 이어내고, 엮어내고, 만질 수 있게 구현하고,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제 작업의 시작점입니다. 때문에 제 작품은 한 번도 같은 작업일 수 없어요. 매번 공간이 바뀌니까요. 

 

 

- 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전시가 될 때의 공간입니다. 때문에 전시가 될 공간을 계속 찾아가서 느껴보고,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합니다. 전시공간이 다 같은 화이트 큐브로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활동을 하면서 제가 경험하게 된 것은 비어있는 미술관의 공간이었습니다. 건축적 형태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리고 그 내부가 작품들로 채워졌을 때 더 빛나게 되는 미술관의 민낯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미술관 공간 자체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간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보라리, 「Yellow Brick Road」,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가변설치 1200 x 800 x 360 cm, 2019.

 

- 「우연의 지평선」은 실들의 얽힘이 시각적으로 극대화된 작업이라 여겨진다. 얽힘이 극대화될수록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형태가 가변적일 것 같은데 작품 사진의 구도는 어떤 기준으로 설정하는지.

직관적으로 좋은 구도를 잡았습니다. 이 질문을 듣고, 저도 제 작품 사진을 쭉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전경 구도입니다. 전시공간의 아우라가 강한 곳에서는 아래의 구도를 잡습니다. 그 공간만의 매력을 극대화하고, 그 속에 제 작품을 함께 담아내려고 함입니다. 

두 번째는 위에서 아래로 본 시점인데, 이 시점은 보통 제 작품의 그림자가 공간에 또 다른 드로잉을 만들어내는 경우 사용합니다. 

마지막은 아래에서 위로 본 시점입니다. 뜨개질 선 하나하나의 질감과 리듬, 반복과 중첩을 드러내고자 할 때 주로 이용합니다. 

 

 

보라리, 한정된 공간_쌍둥이 역설,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50 x 150 x 200cm, 2020.
보라리, 「한정된 공간_쌍둥이 역설」, 폴리에스터와 와이어, 50 x 150 x 200cm, 2020.

- 「한정된 공간_쌍둥이 역설」 에서는 한정된 사각 조형물로 형태를 규정하셨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최근 작품인 한정된 공간 시리즈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라는 철학자가 제시한 ‘파레르곤(parergon)’*에서 착안했습니다. 
틀, 혹은 액자처럼 보이는 프레임이 사실은 제 작품과 무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이 어떠한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변화하듯 프레임에 따라 작품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공간 전체를 사용하는 설치작품은 공간 너머로 작품의 확장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습니다. 경계를 한정 짓는 틀 (프레임)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작품의 바깥에 있지만, 사실상 작품의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조형적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제가 공간을 사용하는 원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는 듯했습니다.

*파레르곤: 파레르곤은 바깥에 위치하지만 지속적으로 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계의 존재다. 예술작품의 장식이나 프레임, 부속품 등이 해당된다. 데리다는 이분법과 동일성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레르곤 개념을 조명했다. 

 

 

- “공상과 감정들이 실들로 묶여 나와서 지워진다”고 하셨다. 구체화 되면 오히려 더 오래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감정이라는 것은 형태가 없어서 쌓일 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없는 대상을 기억 속에 붙잡고, 아직 오지 않은 것들까지 만들어 내어 증폭시킵니다. 저는 이 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의 불안보다 눈에 보이고 잡힐 수 있다면 그 불안이 줄어들까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죠. 구체화되면 오히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화되면 지우거나, 버릴 수 있는 행위의 시작을 마련해 주지 않을까 저는 기대합니다.  

 

 

- 작업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동화에서 많은 이미지들을 가져옵니다. 라푼젤의 성, 오즈의 마법사의 노란 벽돌 길, 빨간 망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이러한 동화들을 차용하는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과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다. 언어가 다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풀어내, 더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 작업 계획은. 

이번 달에는 노원의 당현천에서 ‘노원 달빛 산책’이라는 조명이 들어간 야간 야외조각전을 했습니다. 저는 요즘 라이트 아트(Light Art)의 매력에 푹 빠져있습니다. 내년에는 조명이 들어간 작품 활동을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오는 12월에는 대구예술 발전소의 「유연한 경계」, 오산시립미술관의 「Showcon」전시, 그리고 코엑스에서 「서울아트쇼_블루인아트」가 있습니다. 

공간에 따라 바뀌는 제 작품의 특성상, 앞으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더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아직 공간들이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저 역시 기대가 됩니다. 

보라리 작가(38세)=홍익대 회화과, 텍사스 대학 샌안토니오 미술석사, 홍익대 미술학 박사 졸업 ▷개인전 8회·단체전 다수 ▷아르코 전시사전지원 선정작가 등 ▷오는 12월 대구예술 발전소 「유연한 경계」 전시 예정
사진=보라리

 

 

하혜린 기자 hhr210@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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