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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 등반②] 옛날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한민의 문화 등반②] 옛날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것
  • 한민
  • 승인 2020.12.08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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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엔 낭만과 정과 촉촉함이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한민 문화심리학자

복고열풍이 식을 줄 모른다. 10여 년 전, 옛날 책상과 의자를 갖다놓은 음식점들이 유행하고 유명 관광지에 옛날 교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일 때만 해도 복고는 곧 지나갈 유행처럼 보였다. 


2014년, 무한도전의 ‘토토가’는 복고열풍을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까지 끌어올렸고, 성황리에 방영된 ‘응답하라’시리즈는 그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복고는 2020년 현재에도 ‘싹쓰리’와 ‘슈가맨’, ‘싱어게인’ 등으로 이어지며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옛날에는 낭만이 있었다고. 옛날 사람들에게는 정이 있었고 옛날 노래는 촉촉함이 있었단다. 한편으로 그러한 것들이 사라진 작금의 세태를 한탄한다. 요즘 세상은 각박하고 요즘 사람들은 이기적이기 짝이 없으며 요즘 노래들은 화려한 퍼포먼스뿐이라고.


과연 그럴까. 옛 기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잘 편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벽장 속에서 꺼낸 앨범에는 사진들이 날짜별로 주제별로 잘 정리돼 있다. 사진에 담겨있는 건 수백분의 1초, 찰나다. 사진과 사진 사이에는 적어도 몇 분에서 길게는 몇 년씩의 세월이 숨겨져 있다. 


현재보다 지나간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 카네만은 이를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로 설명한다. 어떤 사건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 일 자체를 처리하고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다. 경험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그 일이 지나고 난 뒤다. 


여행이 대개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이유다. 여행기간의 상당 부분이 지루한 기다림과 조급함, 짜증과 갈등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은 금세 잊혀진다. 기억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몫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이와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순간은 어느 쪽을 골라도 후회하기 마련인 선택들과 견뎌내야 하는 힘겨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기억은 그것을 의미 있고 심지어 아름답게 바꾸어 버린다.


이야기하는 자아가 나설 일이 많은 이들은 아무래도 경험한 일들이 많은 이들이다. 평균연령이 올라가면서(대한민국의 평균연령은 42.6세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방송매체에서 복고가 주류인 이유는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연령 자체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청자들의 연령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복고열풍의 순기능도 있다. 다양한 연령대를 위한 프로그램들은 컨텐츠와 문화산업의 폭을 넓히고 세대 간 공감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회상은 자아통합에 도움이 되며 또한 잠시나마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작정 ‘옛날이 좋았다’는 메시지들은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빼앗는 꼴이 될 수 있다. 옛날엔 낭만과 정과 촉촉함이 있었다는 말은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는 뜻이다. 내가 맛보았던 과거의 그것을 너는 아무리 애써도 얻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상은 노년의 무기다. 노년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노년들은 과거의 기억에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아야 한다. 지난날들이 아름다울수록 내 삶도 가치있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청년들은 다르다. 그들이 찾아야 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야 할 이유와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거가 아름답기 위해 현재와 미래를 추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현재는 원래 힘들기 때문이며 현재를 지나 미래를 살아가야 할 이들을 위해서다. 기성세대의 역할은 청년들이 견딜 만한 현재와 꿈꿀 수 있는 미래를 주는 것이어야지 희망을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청년들에게도 벽장 속 앨범을 꺼내보듯 자신의 인생을 관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힘들고 고된 오늘은 어느새 아름다운 추억이 될 터이다. 하지만 자신의 앨범을 채울 사진과 사진 사이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내 앨범 자랑은 예의가 아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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