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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 학자들의 칼럼 글쓰기, 무엇이 문제인가
흐름 : 학자들의 칼럼 글쓰기, 무엇이 문제인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5.13 0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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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장형에서 현안매몰형까지…전문가다운 글이란

▲ © 일러스트 김차준
오늘날 상아탑은 대중매체 밖에 존재하기보다는 너무나 끈끈한 연관관계에 놓여있다. 교수들은 문인이나 의사, 변호사 같은 이들과 함께 주요한 칼럼 고정필진으로 문지방이 닳도록 언론과 대학을 오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자들의 칼럼에 대해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능력차이에서 1차 이유를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매체의 시대를 맞아 칼럼이라는 글쓰기 양식에 대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지식담론엔 이런 성찰이 빠져있다.

교수, 학자, 전문가, 지식인이라는 네 역할기능이 '아카데미 칼럼니스트'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칼럼에서도 그 네가지 역할에 걸맞은 요소를 요구받는다. 사안과 매체의 성격에 따라 학자의 엄정함과 윤리적 판단이 요구될 수도 있고, 혹은 전문가의 안목과 지식이 요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부조리에 실존적으로 맞서는 지식인의 견해와 주장이 제시될 수도 있다.

'아카데미 칼럼니스트'의 존재양식

물론 이것은 신문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렇다. 원론적으로는 글을 쓰는 학자의 입장에서는 학자와 지식인, 전문가의 역할을 모두 칼럼 속에 녹여내는 글쓰기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미학)는 "신문에서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문성보다는 '전공'이라는 직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교수들은 칼럼란에 등장해서 전공지식만 늘어놓거나 혹은 전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는 편협함을 드러내다가 퇴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편하게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용어로 말이다. 이런 경우는 글이 매우 고집스럽고 독선적일 때가 많다. 그런 데다가 엘리트 의식이 글의 문면에 줄줄 흐르게 되면 그야말로 '안성맞춤 옹고집형' 칼럼이 된다.

이와 다르게 '시어머니형 칼럼'도 그 문제성이 지적되고 있다. 시어머니란 이것저것 참견한다는 의미다. 전공이란 둑이 무너지고 있는 시대라 심리학 교수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일이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왜 심리학 교수라고 정치에 대해 말을 못하겠는가. 다만 글의 내용이 너무나 뻔하고,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경우가 많아서인데, 학자가 그리고 전문가가 굳이 자기의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는 비전문적 주제를 선택해서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불만이 여기서 제기된다.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는 정치학 교수의 정치비평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여기선 '방정식형 혹은 의무방어형 칼럼'이 문제가 된다.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면 그 분야 학자들이 신문사에 몇박며칠 동안 동원예비군처럼 진지를 틀고 '공학적'인 스토리를 세상을 향해 풀어낸다. 칼럼 속에서 세상일들은 마치 2차방정식처럼 "이번 사건은 역사 속의 A와 유사하며, 그 때의 인과관계에 따라 추론하면 이런 대응방식이 합당하다"는 식으로 요리된다. 하지만 이건 정말 지면 메우기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이런 의무방어형 칼럼과 유사하지만 훨씬 주목받고 위험한 게 바로 '선봉장형' 칼럼이다. 자신에 호의적이고 대우를 잘 해주는 언론이 원하는 대로 '립서비스'를 해주는 경우를 말하는데, 지식인들의 이런 칼럼은 칼럼 1편에 1백만원이란 상징문구와 함께 입방아를 많이 찧어왔지만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이런 교수들은 매체의 영향력과 자기 발언의 영향력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발언에 의한 추후여파가 클수록 다음 글에서는 윤리적 계도의 강도가 높아진다.

글쓰기의 균형감 혹은 처세의 균형감각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신문방송학)는 위에서 호령하는 이런 방식의 칼럼에 강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즉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옳을까" 하는 일말의 의심이나 자기성찰성이 없이 훈수하고 잘난 체 하는 글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이런 글쓰기가 지난 세대 선배 지식인들에 만연해 있다며 "오늘날은 직접 살을 맞대야 소통되는 시대다. 자기가 빠진 글, 자기에 대한 되돌아봄이 없는 글은 이론과 개념으로 보는 이들을 위축시켜도 설득력이 없다. 고민의 흔적이 사사롭게 녹아나는 게 좋다"라고 말한다.

'선봉장형' 칼럼과 동종교배해서 태어난 기형아가 바로 '양비론형' 칼럼이다. 좋게 말하면 이쪽저쪽의 입장을 잘 고려한 중립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모호하게 말을 풀어가다가 당위적 결론으로 골인하는 유형이다. 특정 관점으로 여론이 호도되길 밥먹듯 하는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양비론은 꼭 필요한 칼럼쓰기의 지켜야 할 보루이지만, 매너리즘처럼 모든 사안에 넘쳐나는 양비론은 큰 문제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건 글쓰기의 윤리적 균형감각이 아니라, 단순히 처세의 균형감각일 뿐이다.

학자들이 신문에 참가하는 것은 신문이 내주는 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신문 논설위원들이 작성하는 칼럼, 시평, 포럼, 시론, 여론 등의 코너는 정치칼럼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고, 그들의 논조는 "매우 단선적인 비판이거나, 곡비가 보여주는 천편일률적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다는 비판이 많다. 이럴 때 학자들의 글쓰기는 이런 단편성과 천편일률성을 벗어나 다양한 시각과 분석으로 신문지면의 다채로움을 보강하는 역할을 요구받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칼럼이 이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다르게 보려는 창조성과, 묻혀있거나 주목받지 못하는 이슈를 발굴하려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논설 따라하기형' 혹은 '독백형' 칼럼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이 발전하면 이른바 '순결지상주의형'이 된다. 특히 문인들의 글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 유형은 "한국정치를 그저 더러운 똥으로 보면서 그런 정치에 초월해야 한다"는 식의 무시와 비난, 비꼬기로 일관한다.

이런 칼럼은 현실적이지 못하고, 자아중심적이고 게다가 대안이 없는 글쓰기인지라 매우 바람직하지 않지만 꽤 많은 비중이 이쪽에 속한다. 그만큼 칼럼이 '감정배설'의 통로로 그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특정 정파나 입장을 '공격'하는 도구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점은 비판하고 고쳐가면 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현안매몰형' 칼럼이다. 이것은 한국 칼럼니스트들의 지식의 수준과 성향이 맞물려 빚어내는 풍경이라 매우 고질적이다.

문정우 시사저널 편집장은 교수들의 칼럼 내용이 '국내'와 '현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가장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라크 파병에 관련한 칼럼만 하더라도, 이라크 현지에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조사나 혹은 외국 지식계의 이와 관련한 담론을 숙지한 상태에서 독자들의 인식지평을 넓혀주는 칼럼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전문가로서 글을 쓰면서도 그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지식인 칼럼의 현황은 차라리 비극적이지 않을까. 문 편집장은 "가까운 일본만 해도 전문가들이 굉장히 많다. 변방의 나라에서는 어떤지 기자들이 잘 모르는 그야말로 '전문가'다운 칼럼니스트가 넘쳐나는데 국내는 필자기근이 심하다"라고 아쉬워한다.

이와 관련 자연스럽게 올해 초 유명을 달리한 故 김진균 서울대 교수(사회학)의 말이 떠오른다. 김 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진보에서 희망을 꿈꾼다'(박종철출판사 刊)란 칼럼집의 서문에서 "나의 글들은 그 어떤 매체를 통한 발언일지라도 교수로서의 논문 형식의 글쓰기와 동일한 비중의 책임으로 작성되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 바 있다. 이런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수들의 칼럼을 묶어낸 칼럼집은 '부수적인 발언'이나 '여가활동의 산물'로 취급되기 일쑤다. 움베르트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열린책들 刊)에 실린 에코의 칼럼들이 '미니멀 다이어리'라는 새로운 글쓰기 영역을 개발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어서 입맛이 쓰다.

칼럼은 운동, 창조적 사고와 노력이 필요한 이유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학자들의 칼럼에 글쓰기에 대한 미학이 많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추상적인 보편성에 치우쳐있고,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칼럼은 '양반다리형'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원래 이래야 한다"는 식의 타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그러나 형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서는 곤란하다. 물론 구체성과 추상성을 비유와 상징을 통해 오가면서 말의 선명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쟁력 있는 팩트'를 통해 '전문가 칼럼'의 위상을 찾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지만 말이다.

심재철 고려대 교수(정치커뮤니케이션)는 "교수들도 자기 이름 걸고 쓰는데 그냥 막 쓰겠느냐. 연구실에서 밤새며 쓴다"라고 너무 비판적으로 보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는 교수들의 칼럼쓰기가 일종의 대사회 서비스이면서 동시에 자기 분야에 대한 토론에 참가함으로써 자기 지식을 업그레이드하는 두가지 기능에서 설명한다. 그 '토론'에 방점을 찍는다면 글쓰기 자체에 목을 매기보다는 토론을 위한 정보 준비, 관점의 확보가 멀리 내다볼 때 지식인 칼럼의 안정적 착지를 위해 더 소중한 작업일 듯하다. 전규찬 강원대 교수는 "칼럼은 운동이다. 그것은 신문매체의 성격과 구조를 열고 흔들어야 한다. 이것을 칼럼의 내용과 형식으로 해내야 한다"라고 칼럼에 적극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칼럼 안에서 개념도 새로 만들고 뭔가 창조적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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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원 2004-05-15 12:09:41
칼럼 1편에 1백만원 받기 때문에 쓴다는 식으로 교수를 매도하는 건 문제가 많군요.
어느 신문이 그렇게 많이 주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신문은 그렇게 주지도 못하며, 또 돈 때문에 매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렇게 주장하는지?
교수신문 맞나요?

글쓰기 2004-05-14 14:21:25
요즘은 연구 많이 하는 사람이 칼럼도 쓰던데, 아직 그것도 모르나봐.

만취 2004-05-14 14:14:50
이 기사는 어떤 유형에 속할까 궁금하군요.
대부분의 경우 '분류'에는 약간의 과장이 포함될 수밖에 없지요. 이념형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이 기사의 분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군요.
특정 칼럼이나 칼럼니스트를 꼬집어 말하지 않으면서 분류의 틀 뒤에 숨어서 비판할 경우 내용이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지요. 좋게 표현해 추상적이지 실제로는 내용이 공허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따라야 할 전범으로는 에코 같은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조건도 상황도 전혀 다른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