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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서울대 교수] “아이의 정신으로, 디오니소스신처럼 생을 유희하라”
[박찬국 서울대 교수] “아이의 정신으로, 디오니소스신처럼 생을 유희하라”
  • 김재호
  • 승인 2020.12.18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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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 l 세창출판사 l 344쪽

꼬마 목사에서 적그리스도로 변화한 니체
병약한 생명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을 극복해야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 니체에게서 영향 받아

니체(1844∼1900)의 대표적 저서는 아마도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일 것이다. 국내에만 30여 권이 번역본이 나와 있고, 그 유명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1864∼1949)의 교향시는 제목이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이다.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K-MOOC에서 ‘니체 읽기-인문고전 『차라투스트라 이렇게 말했다』’를 강의했다. 이 강의를 위해 준비했던 원고가 『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로 세상에 나왔다. 지난 9일, 박 교수를 인터뷰했다.  

박찬국 교수는 니체가 고통 속에서 삶을 보냈지만, 초인적인 의지를 드러냈다고 책에서 밝혔다. 사진 = 박찬국

니체의 유명한 경구 중 하나는 “신은 죽었다”이다. 기독교적 이원론에 따라 현실 너머의 이상을 좇는 세태를 니체가 비판한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할 때, 그 신은 인간에게 너무 많은 죄와 짐을 지우게 하고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신이다. 니체의 시대진단은 인간이 스스로 서게 되는 반기이자 선언이다. 그런데 꼭 신은 살해되어야만 하는지, ‘신과 함께’ 인간이 주체성을 획득할 순 없을까? 

박 교수는 “니체는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이 만들어낸 허구와 병약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이 만들어낸 허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면서 “니체가 모든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니체는 다양한 신이 존재한다고 본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할 때의 신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신이다”라며 “니체는 기독교의 신 못지않게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신들도 허구라고 보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니체가 제시한 신은 ‘디오니소스신’이다. 박 교수는 “니체는 우리가 세계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신처럼 어떠한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생을 유희하듯이 살라고 말한다”면서 “이렇게 유희하는 자는 기독교인처럼 죽음 이후의 영속적인 존재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관심이야말로 생성소멸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염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기독교나 그리스의 신들은 허구

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다. 니체가 크면 목사가 되길 바랐던 탓에 어린 시절 니체는 신앙심이 컸다. 박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니체는 ‘꼬마 목사’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를 열심히 믿었다. 하지만 초인을 지향했던 니체는 나중에 ‘적그리스도’가 된다. 이는 니체가 설파했던, ‘낙타→사자→아이’로 이어지는 정신과 교차한다. 『차라투스트라,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다』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낙타의 정신은 전통적인 권위와 가치에 순종하는 정신이며, 사자의 정신은 그것에 반항하는 정신입니다. 아이의 정신은 그 어떠한 전통적 권위와 가치에도 매이지 않고 인생을 유희하듯이 명랑하게 살아가는 정신입니다.”

꼬마 목사에서 적그리스도로 나아가는 니체의 변화는 마치, 낙타의 정신이 사자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아 보인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자신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때의 니체는 기독교에 대한 반항과 거부를 통해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사자의 정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니체 따르면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할 뿐 새로운 가치는 창조하지 못한다. 자신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당시의 니체는 이미 초인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자의 정신을 넘어선 아이의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낙타의 정신에서 아이의 정신으로

전통과 권위, 국가와 체재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체제전복적으로도 들린다. 그렇다면 과연 사회 변혁을 외치는 정치사상가들에게 니체의 철학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박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자 루카치와 반대되는 들뢰즈의 니체 해석을 설명했다. 박 교수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푸코나 데리나나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이념 지형상 좌파에 속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니체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고 있다”면서 “들뢰즈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은 근대의 관료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는 반면에, 니체는 근대의 합리적인 관리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창조적인 유희를 중시하는 유목적인 사유를 제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라고 답했다.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말세인’에 대한 니체의 경고였다. 말세인이란 한마디로 허상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초극 없이 몸과 마음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말세인. 말세인은 자극적인 쾌락과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종교적 위안에 취해있다. 작은 쾌락과 행복에 연연하는 말세인은 소시민적 인간들이다. 박 교수는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니체가 보았다면, 말세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니체가 말한 행복이란 생명력이 넘쳐서 힘이 증가하고,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이 드는 상태를 뜻한다. 위험과 모험을 추구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말세인이 되어가고 있진 않은지 되돌아볼 때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시대진단은 인간이 스스로 서게 되는 반기이자 선언입니다. 그런데 꼭 신은 살해되어야만 하는지, ‘신과 함께’ 인간이 주체성을 획득할 순 없는 것일까요?

니체는 다양한 신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할 때의 신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신입니다. 니체는 기독교의 신 못지않게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신들도 허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이 만들어낸 허구와 병약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나 민족이 만들어낸 허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니체가 모든 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이 갖는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전혀 갖지 않는 이른바 순수영혼 내지 순수정신으로서의 신입니다. 신을 이렇게 생각할 때 인간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악한 것으로 단죄하게 되며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신을 살해해야 한다’고 말할 때의 신은 이렇게 인간에게 양심의 가책과 함께 자신을 학대하게 하면서 생명력을 약화하는 신입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욕망과 충동을 갖는 존재들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충동을 신들도 갖는다고 봄으로써 그것들을 신성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니체는 신약성서를 생명력이 쇠퇴한 인간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서 경멸했지만, 유대인들이 전성기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쓰인 구약성서 부분은 매우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힘에 넘치는 하나의 민족이 자신에 대해서 갖는 높은 긍지와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고 봅니다.
니체는 기독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으로서 ‘디오니소스신’을 내세웁니다. 이 신은 기독교의 신처럼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세계로서 그 안에서는 무수한 종이 생겨나고 이러한 무수한 종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니체는 세계는 낭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롭다고 봅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생명력으로 세계는 끊임없이 다채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유희합니다. 니체는 우리가 세계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신처럼 어떠한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생을 유희하듯이 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유희하는 자는 기독교인처럼 죽음 이후의 영속적인 존재와 같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심이야말로 생성소멸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염증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 책의 36쪽을 보면, “꼬마 목사로 인생을 시작했던 니체는 적그리스도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라고 적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꼬마 목사 ---> 낙타의 정신. 적그리스도 ---> 사자의 정신, 이런 식으로 비유해도 되는 것일까요?

니체는 어릴 적에 ‘꼬마 목사’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이 당시 니체의 정신적 수준은 기존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아무런 불만 없이 구현하려고 하는 낙타의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의 니체는 다른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주입했던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았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니체도 부모의 소원에 따라서 목사가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자신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때의 니체는 기독교에 대한 반항과 거부를 통해서 독자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사자의 정신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체 따르면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할 뿐 새로운 가치는 창조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당시의 니체는 이미 초인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자의 정신을 넘어선 아이의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정신은 인생에서 보이는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세의 천국이나 미래의 유토피아와 같은 것들에 기대지 않고 인생을 흔쾌히 긍정하면서 유희하듯이 사는 정신입니다.   

△ 98쪽을 보면, “자신을 초극하는 과정은 기존의 자신을 해체하고 새로운 자기를 획득해나가는 과정입니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을 해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자기에 대한 분석과 자기직시’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요?

기존의 자신을 해체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자로서의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낙타로서의 자기를 해체해야 하겠지요. 

△ ‘긍지와 지혜’, ‘사자의 정신’, ‘육체가 전부다’, 힘에의 의지, 욕망과 현실의 중요성 등을 니체가 강조한 것을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체제 전복적인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책의 156쪽을 보면, “니체는 국가가 국민들에게 안정과 행복을 보증하는 대가로 일반 대중뿐 아니라 초인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까지 맹목적 복종과 우상숭배를 요구한다고 보았습니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오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는 나쁜 사회체제에 대한 전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사회 변혁을 외치는 정치사상가들에게 니체의 철학은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까요? (355쪽에서 “나치즘이라는 극우사상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정부주의라는 극좌사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상적 조류가 니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라고 적으셨습니다.)

니체 사상의 정치적 영향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나치즘과의 연관이겠지요. 실로 나치즘은 니체를 국가철학자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니체의 엘리트주의가 나치즘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니체는 반유태주의를 부정했고 독일 민족주의나 독일 국수주의도 경멸해 마지않았습니다. 니체는 유대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의 혼혈을 주창하면서 나치의 아리아족 순혈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아울러 니체는 프랑스문화를 독일문화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다고 평했습니다. 로젠베르크 같은 사람이 니체를 나치의 국가철학자로 만드는 데 앞장섰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나치 철학자 중에서도 니체의 철학과 나치즘은 본질상 부합되지 않는다고 니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떻든 니체 당시의 많은 독일인이 니체의 여동생을 포함하여 니체의 사상과 나치즘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국가가 출산을 관리함으로써 우수한 엘리트들을 계획적으로 육성하려는 나치즘의 정책이 초인을 계획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니체의 사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도 보이는 것이기에 니체만의 독자적인 사상으로 보기는 어렵겠지요. 나치의 그러한 정책에는 당시 유해하던 우생학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푸코나 데리나나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이념 지형상 좌파에 속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니체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들뢰즈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은 근대의 관료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의해서 오염되어 있는 반면에, 니체는 근대의 합리적인 관리 메커니즘을 거부하고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창조적인 유희를 중시하는 유목적인 사유를 제창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에 의해 사람들을 관리하고 프로이트주의는 가족에 의해서 관리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관리함으로써 특정 사회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을 들뢰즈는 코드화라고 부릅니다. 이와 반대로, 니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코드를 넘어서 코드화될 수 없는 새로운 신체를 발명하는 일을 자신의 사상적 과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니체 해석은 니체를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로 보았던 마르크스주의자 루카치의 견해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카치의 니체 해석도 문제가 있지만, 니체 사상이 갖는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과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들뢰즈의 해석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그의 『안티크리스트』에서 이상적인 사회형태는 다음과 같은 세 계층, 즉 정치를 전담하는 정신적으로 탁월한 소수와 육체와 기질이 강하여 방위를 전담하는 군인 그리고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다수의 평균인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플라톤이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순수한 영혼과 불순한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이원론에 빠져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극히 유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 이웃에 대한 동정이 ‘타인의 불행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비판하고, 자기애를 강조한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자기애는 자기완성이고, 이를 통해 운명애가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웃사랑에 빠지게 되는 삶의 공허함이나 무력함, 고통 등을 정말 부인하기가 쉽지 않고, 벗어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인을 지향해야 하는 건 머리로는 알겠지만, 현실의 부조리함과 처참함 앞에서 나약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만인을 위한 책이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만인을 위한 책’이란 ‘모든 사람이 읽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란 ‘이 책에서 표방되고 있는 고귀한 이상을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니체는 이 책에서 설파하는 초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초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니체가 말하듯이 자신을 고양하고 자신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욕망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부르고 있지요. 저는 제 주위에서 자신의 열정을 쏟을 일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해서 고민하는 청년들을 종종 봅니다. 이들은 밤새워 일하더라도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찾지요.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에베레스트를 오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 인간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통 없는 안락만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고난과 대결하면서 자신의 강력한 힘을 느끼고 싶어 하는 열정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열정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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