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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게, 어서 오시게 왜 이제 왔는가?”
“이보시게, 어서 오시게 왜 이제 왔는가?”
  • 양진오
  • 승인 2020.12.2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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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② 나를 반긴 도동서원 김굉필 나무

"나의 배움이 나의 삶을 생성하는 지역과 밀착되어야 했다. 
이렇게 반성하며 여름에 두 차례에 걸쳐 대구 달성 도동서원을 다녀왔다."

‘국민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의 나라로 배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 사계절이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배웠다. 덤으로 한국인은 사계절을 겪기에 성실하지만 더운 나라의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배웠다. 반면 나라의 영토 면적은 작으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다고 배웠다. 고구려를 만주와 중국 동북을 ‘호령’한 나라로 배웠다.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서야 이 배움이 얼마나 편향적인가를 깨달았다. 또한 어른이 되어서야 이 배움이 가르쳐 주지 않은 또 다른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금수강산은 나라 안에도 있었고 밖에도 있었다. 우리나라 영토 면적보다 작은 나라가 적지 않았다. 금수강산과 영토 면적은 상대적 개념이거나 비유 방식이었다. ‘국민학교’의 배움은 이렇게나 편향적이었지만 나는 창공의 넓이를 모르는 작은 새처럼 그 얕은 배움에 의지해 어른이 되어갔다. 

금수강산·영토 면적을 앞세울 일이 아니다

먼저 이렇게 묻기로 하자.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의 나라인가? 이 표현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천혜의 자연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아주 틀린 전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강산이 천혜처럼 보이기는 한다. 문제는 이 전제를 뒤흔드는 재난이 끊이지 않는 데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올해 여름에 있었던 기습 호우이다. 올해 여름은 장마의 계절이 아니었다. 올해 여름은 돌풍과 우박을 동반한 기습 호우가 한반도를 괴롭힌 계절이었다. 미세 먼지는 일상이다. 금수강산이 편치 않다. 

나라의 영토는 어떤가? 우리나라 영토 면적보다 작은 나라가 허다하다. 예컨대 유럽의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스위스 영토 면적이 우리나라보다 작다. 영토 면적이 작은 나라는 이들 나라 외에도 상당하다. 국민학교 시절, 고구려 영토 면적을 자랑스럽게 배운 나는 나라의 영토 면적을 국력의 근본으로 알았다. 아니 그렇게 알도록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키워졌다. 영토 면적이 국력의 근본은 아니었다. 영토 면적이 국력의 기준이 될 수 없었다. 영토 면적보다 문화가 국력의 기준일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 영토 면적이 작은 나라, 예컨대 빛의 마법사로 비유되는 화가 렘브란트를 배출한 네덜란드의 문화 수준이 만만치 않다. 달리 말해, 네덜란드의 국력이 얕다고 말하기 어렵다.

2020년의 사회적 의제는 거리두기와 멈춤이다. 더는 금수강산과 영토 면적을 앞세울 일이 아니다. 금수강산과 영토 면적으로 상징되는 국가적 대주제에 대해 거리를 두고 너와 나의 삶이 비롯되는 자리를 우선 성찰할 일이다. 금수강산과 영토 면적보다 앞세울 주제는 생성되는 자신의 삶이며, 그 삶이 이뤄지는 장소의 자리이다. 자신의 삶이 생성되는 장소는 세대와 취향에 따라 집, 학교, 직장, 카페, 식당, 극장, 거리, 광장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들 장소에서 성장하고 사랑하고 연대한다. 또한 사람들은 이들 장소에서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투다가 또 다른 장소를 모색한다. 이 장소들이 포진된 지역에서 사람의 삶은 여러 형태로 생성된다. 

지역과 근대 국민국가 체제

묻기로 하자. 지역은 무주공산인가? 그렇지 않다. 지역과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관계는 난마처럼 복잡하다. 지역과 지역의 관계 역시 그렇다. 지역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범주나 영역이 아닌 게다. 지역에 강제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구의 영향력은 어떤가? 그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다. 코로나19 사태는 리트머스다. 어떤 리트머스인가? 코로나19 사태는 대규모 감염을 통제할 수 없는 근대 국민국가의 한계를 명백히 노출하면서 동시에 국민을 상대로 위생 권력을 집행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현실적 영향력을 드러나게 한다.
그렇다면 근대 국민국가 체제는 지역을 완전히 굴복시켰을까? 그렇지 않다. 지역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 포섭된 어떤 영역으로 보이지만 그 영역은 그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기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대구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민국가에 포섭된 지역 같으나 완벽히 포섭된 건 아니다. 대구만 그런 게 아니다. 제주, 부산, 광주도 그렇다. 요컨대 지역은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생성하는 영역으로 이해될 법하다. 

지역을 더 깊게 주시해야 했다

이제 솔직히 말해야겠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2020년, 지역을 더 깊게 주시해야 했다. 지역을 텍스트로 비유할 수 있다면, 나는 아직도 이 텍스트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의 배움이 나의 삶을 생성하는 지역과 밀착되어야 했다. 이렇게 반성하며 여름에 두 차례에 걸쳐 대구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 사적 제488호, 대구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번지)을 다녀왔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도동서원 입구에 김굉필 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김굉필 나무의 수령은 400년을 넘는다. 마치 김굉필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 같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도동서원 입구에 김굉필 나무로 불리는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김굉필 나무의 수령은 400년을 넘는다. 마치 김굉필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 같다. 사진=양진오

도동서원은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김굉필의 스승이 김종직이며 제자가 조광조이다. 조선조 사림 네트워크 가운데 자리에 김굉필이 있다. 인문학 선생을 자처하는 이가, 지역 원도심 학교의 개교를 꿈꾸는 이가 2020년 여름에 도동서원을 다녀온 거다. 

두 차례에 걸친 도동서원 답사. 도동서원 강학 공간인 중정당(中正堂)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환주문(喚主門)을 거쳐야 한다. 환주문은 크고 웅장하지 않다. 환주문을 통과할 때 머리를 숙여야 한다. 배우는 자, 근신하라는 말이겠다. 중정당 처마에는 화려한 단청이 없다. 배우는 자, 가식을 버리라는 말이겠다. 조선조 사림의 정신을 대표하는 김굉필을 배향하는 서원이 대구 달성에 있었다. 나는 올해 여름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도동서원을 출입하며 마을 학교의 원형을 거듭 고찰해야 했다. 그런데 올해 비로소 도동서원을 출입하고 있으니 이 또한 반성할 일이다. 

환주문을 통과해야 도동서원의 강학 공간인 중정당이 나타난다. 환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사려야 한다. 배우는 자, 근신하라고 도동서원 환주문이 가르친다.
환주문을 통과해야 도동서원의 강학 공간인 중정당이 나타난다. 환주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사려야 한다. 배우는 자, 근신하라고 도동서원 환주문이 가르친다. 사진=양진오
도동서원 중강당 처마에는 화려한 단청이 없다. 배우는 자, 가식을 멀리하라는 말이다. 흰 종이(상지, 上紙)가 기둥을 두르고 있다. 상지는 도동서원에서만 볼 수 있다. 도동서원이 배향하는 김굉필은 조선 5현의 으뜸으로 존경받아서 그렇다.
도동서원 중강당 처마에는 화려한 단청이 없다. 배우는 자, 가식을 멀리하라는 말이다. 흰 종이(상지, 上紙)가 기둥을 두르고 있다. 상지는 도동서원에서만 볼 수 있다. 도동서원이 배향하는 김굉필은 조선 5현의 으뜸으로 존경받아서 그렇다. 사진=양진오

두 차례에 걸친 도동서원 답사.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김굉필 나무로 불리는 도동서원 입구의 4백 년 은행나무는 찬연했다. 김굉필 나무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반겼다. “이보시게, 어서 오시게 왜 이제 왔는가?”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과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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