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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언젠가 필요한 연구를 위해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언젠가 필요한 연구를 위해
  • 정덕기
  • 승인 2020.12.29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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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신라의 제도를 연구한다. 사학의 많은 분과 중 제도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도사 연구는 진입장벽이 높고, 연구의 결과물은 길고 밋밋하기 때문이다. 순수학문이 대개 그렇지만, 들인 노력과 비용 대비 ‘튀는’ 산물을 내놓기 어렵고, 유행이나 이슈를 만들기가 더 어려운 것이 시스템의 역사이다. 학문적 순수성을 많이 요구하는 기초학문이라서 지원받을 곳이 희박한데, 올해부터 신진연구자 지원사업의 수혜를 입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연구자의 자기만족을 강조하나, 연구자도 사람이라 생활비와 게재료는 벌어야 연구 활동이 가능하다. 한국연구재단에서의 과제선정 통보는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고, 기뻐서 춤을 출 만한 소식이었다. 재단의 부탁을 받고 무엇을 쓸까 고민하다가 필자 연구의 경험을 나누어 보기로 했다.

필자가 제도 연구에 투신한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 고대의 금석문을 읽다가 문장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벼슬’ 이름만 알아도 자료를 읽을 수 있을 듯했다. 관직을 보려니 관위를 보아야 했고, 양자를 설명하려면 관청도 보아야 했다. 관위·관직·관청의 3자 관계를 설명하려면 관인의 대우·의례와 정원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다. 구체성을 갖추기 위해서 중국의 비슷한 자료를 샅샅이 읽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중국 고대 제도의 비교는 당연히 필요했다. 이에 대한 문제는 한·중 양국의 발달 과정을 살펴야 해명할 수 있었다.

앞선 연구에서 이 문제를 ‘선진적인 중국 문물의 수용과 변형’으로 접근한 경우가 많지만, 필자는 중국 문물의 수용보다 한국 내부의 발전 과정과 전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중 제도의 이름은 비슷하나, 내부의 운영방식이 무척이나 다르기 때문이었다. 한·중 양국이 자국 전통과 경험을 개선하고 쇄신하면서,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설명한 것이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한국·중국이 먼 옛날부터 당연히 달랐기 때문에 현재도 다른 것이다. 학위논문을 쓰면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설명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학위 이후 계속 글을 써내는 것을 보면, ‘옛날 책’을 보면서 고생한 시간에 의미가 있는 듯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3편의 글을 통해 신라 공무원의 정복·약복이 삼한(三韓)의 고유한 관복에서 발달했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신라·중국 관복의 구성 품목에 차이가 있음을 설명하고, 차이가 나는 원인을 상술하고자 7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긴 자료와의 싸움을 일단락했더니, 한·중 네티즌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의도는 아니나, ‘옛 일’을 짚어 오늘날에 기여한 듯해 감회가 남다르다.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과거를 살펴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 언젠가 필요한 기초학문이라 하지만, 조금 더 편한 길이 있는데 힘든 길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다. 필자도 이 분야를 공부하며 전공을 빨리 바꾸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성과를 위한 품도 많이 필요하고, 밋밋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지겹지만 언젠가 필요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 기초학문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학계에서 활동하시는 것은 각자의 사명을 생각하며 묵묵히 공부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에 필요하거나 성과가 빠르게 생산되는 연구만 아니라, 언젠가 필요한 기초 연구가 많을수록 학술은 탄탄해질 것이다. 앞으로도 젊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연구에 선뜻 투신하도록 장려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는 것에, 한국연구재단이 계속 앞장서주었으면 좋겠다.

 

 

 

 

 

정덕기 서울대 기초교육원·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강사

연세대에서 ‘신라 상·중대 중앙행정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행정, 군사, 관복 등 한국 고대 국가의 제도·예제에 관심을 두고, 한·중 비교사의 입장에서 유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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