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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이 꼴 보기 싫은 당신에게
“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이 꼴 보기 싫은 당신에게
  • 박강수
  • 승인 2021.01.22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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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대표: 역사, 논리, 정치』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 노시내 옮김 | 후마니타스 | 312쪽

현대정치의 구조 밝힌 설계도

대표제 속 반동과 혁명의 역설

 

‘민주주의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 고심이 깊은 독자라면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을 뒤적거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에 번역된 책은 세 권이다.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18),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아날로그, 2020, 이하 『쿠데타』), 그리고 모니카 브리투 비에이라 요크대 교수와 함께 쓴 『대표: 역사, 논리, 정치』(이하 『대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런시먼의 진단은 비관적이지만 겁을 주기보다는 턱을 괴게 한다. 가령 3년 전에 쓴 트럼프 취임식 감상평을 보자.

“2017년 1월 20일 미국의 민주주의를 끝장낼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쿠데타』 서론) 옆에 앉은 사람들이란 오바마와 힐러리를 가리킨다. 진짜 미국의 민주주의를 박살내는 힘은 막 당선된 트럼프가 아니라 ‘대선에 불복할 수도 있었을’ 민주당에게 있었다는 말이다. 이어서 런시먼은 이렇게 쓴다. “민주주의는 교전 없는 내전이다. (패배자가 불복해) 대리전이 실전으로 바뀔 때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2021년을 맞은 우리는 이 문장에서 지난 6일 워싱턴을 떠올리게 된다. 트럼프가 슬쩍 등을 밀어주자 그의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미국 민주주의를 점거했다. 예언적중이라고 호들갑을 떨 것까진 없으나 이런 생각은 든다. 런시먼이 정확히 봤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을 점거한 트럼프 지지자들
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D.C 의사당을 점거한 트럼프 지지자들. 사진=EPA연합

 

민주주의보다 본질적인, 더 근본적인

 

『대표』는 세 번째로 번역된 책이지만 출간일로 따지면 셋 중 가장 오래된 저작이다. 2008년에 나왔다. 다른 두 권의 책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큐레이션을 붙인 풍경화라면 『대표』는 근대 이후 정치의 근본 원리인 대표제의 구조를 규명한 설계도다. 저자들은 대표야말로 현존하는 무수한 정치적∙사회적 제도와 현상을 포괄하는, “민주주의보다 더 열린 개념”이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기능적으로도 그러한데 역사적 측면에서 논의는 특히 홉스의 통찰에 크게 기대고 있다.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대표를 근대국가의 핵심원리로 파악한 기념비적 저술이다. 홉스에게 국가는 ‘개인들 간의 약속, 사회계약의 산물’로 그저 군집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런 통합된 힘도 가질 수 없던 이들이 합의해 대표 기구를 출범시키고 절대적인 권력을 의탁한 결과물이다. 대표를 통해 인민은 국가를 만들어내고 국가는 인민이라는 정치적 통일체를 확립시켜 준다. 양쪽의 정체성이 동시에 생성된다. 따라서 대표제는 “반동적인 지향과 혁명적인 지향”을 함께 갖는다. 대표는 권력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복종을 이끌어내고자 인민을 활용하는 도구이면서 인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이든 적절한 대표자를 찾기만 하면 권력의 장에 의지를 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적 힘이다.

 

1651년 출간된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 프랑스 판화가 아브라함 보세의 작품이다. 사진=위키피디아
1651년 출간된 '리바이어던' 표지 그림. 프랑스 판화가 아브라함 보세의 작품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무엇을,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

 

홉스가 알아챈 역설적 긴장 관계는 대표제를 더 유연하고 창조적인 개념으로 바꿔 놓는다. 요컨대 대상과 대상을 재현한 것(대표자)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존재한다. ‘국민의 뜻’을 운운하는 국회의원들의 말버릇이 거슬린다면 이 거리감을 잡아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민과 대표자 사이 간격을 메우려는 시도는 헛된 것”이라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간격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대표자의 행위를 평가하고 항의할 기회도 없어진다. 이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를 불러들이는 일”(네덜란드 역사학자 프랑크 앙커스미트)이 된다.

비에이라와 런시먼은 정치 체제를 넘어 놀랍도록 많은 기구와 현상을 대표로 설명해낸다. 법률대리인부터 배심원단, 시민단체, 국제연합, 자선 활동을 펴는 셀럽과 세계화까지, 기저에서 대표의 원리가 작동한다. 다시 한번 홉스의 말을 빌리자면 “거의 모든 것은 대표될 수 있다.” 관건은 대표하고자 하는 의제를 얼마나 그럴듯하고 실감나게 구성해 내는가 하는 일이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당면한 문제다. 대표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울분(울타리게임)과 너무나 밀접하게 대표되는 사람들의 흥분(팬덤정치)이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키는 사이 ‘그럴듯하게’ 의제화되지 못한 실존적 문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책장을 덮고 나면 트럼프를 보면서 지었던 한숨(민주주의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을까)은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로 다듬어져 있다. ‘미래와 지구를 대표하는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를 가로막는 유인은 무엇일까.’ 막막한 현실을 비관하더라도 정확히 비관할 줄 알아야 비관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뜻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무엇이(누가) 어떻게 대표되기를 바라는가. 앞으로 더 자주 맞닥뜨릴 단단한 물음을 건네 받았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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