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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죽음' 부르는 검열의 미망
학문의 '죽음' 부르는 검열의 미망
  • 허영수 기자
  • 승인 2004.06.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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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사건, 국가보안법을 되비추다

[사회기획] 학문·사상의 자유 침해와 국가보안법

언제까지 학계가 국가보안법의 망령에 고통을 겪어야 하나. 법원이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과 저술활동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결하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안팎으로 거세지고 있다.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정치적 싸움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개·폐 여부가 참여정부와 17대 국회의 '개혁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보여준 국가보안법에 의한 인권 침해 실태는 국가보안법 개·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편집자주>

송두율 교수의 저술 활동을 국가보안법이 재단할 수 있는가. 송 교수에 대한 2심 공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최근 국제엠네스티가 대한민국 정부에 국가보안법의 학문의 자유 침해를 지적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가 하면, 재외학자 1백75명이 사법부에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국가보안법이 국제적 눈총을 사고 있다.

해외 학자들이 비판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국제적 '놀라움'와 '분노'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가공할만한 '輕視'에 가 닿아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까지도 상이한 사상에 대한 폭넓은 관용 없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원호 미국 미시간대 정치학 박사 등 재외학자 1백75명이 지난 달 25일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질의 및 탄원서'를 통해 '학문의 자유 침해' 부분을 지적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들은 탄원서에서 "1심 판결은 송두율 교수의 행위보다는 그의 학술 활동의 내용, 즉 그의 사상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면서 "재판부는 학술 연구의 내용에 대한 사법당국의 평가와 단죄를 시도함으로써 실질적인 학문 검열의 길을 열어놓았다"라고 비판했다. 저술 활동에 대해 사상 검증이 작동되면, 그때부터 학문간 상호 대화는 중단되고 사상에 대한 자기 검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지점에서 학문의 '죽음'과 '종말'을 내다봤다.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 내용이었다. 송교수 사건과 관련,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학문의 자유 등은 인간의 내적·정신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학문활동에 이르면 이는 대외적인 것이므로 국가의 안전 보장 및 공공의 질서 등을 위한 그 어떠한 법에 반하는 행위도 국민의 기본권 이론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표명했던 것이다. 저서 등으로 표현된 이상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라는 것. 학계와 첨예하게 입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재외학자들은 "내면적으로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법원이 학문의 자유를 제약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학문은 학문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는 것은 상식"이라면서 "학문은 각자 의견들이 서로간에 대화와 반증을 교환하면서 거듭날 토양이 마련된 후에야만 시작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보수·진보 진영의 구분을 떠나, 학자의 저술활동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이미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간 송두율 교수의 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던 강정인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최근 한국일보 지면에서 "법원의 판결은 송 교수의 저술 활동, 특히 내재적 접근법이 '맹목적 친북 세력을 양산해 국가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다는 논거로 유죄를 인정하고 있지만, 학자에게는 저술 활동이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이기에 법원의 판결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덧붙여 강 교수는 "송 교수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그 시시비비는 정치의 장이 아니라 학문의 장에서 가려져야 한다"라고 피력했다.

'송두율 교수 석방과 학문·사상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은 "연구방법론의 옳고 그름은 오직 학문의 법정에서 다룰 문제이지 사법적 판결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송두율 교수 사건은 사망선고를 받은 것으로 간주된 국가보안법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며 국가보안법 폐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편, 송두율 교수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자, 세계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 한스 위르겐 크리스만스키 뮌스터대 교수 등 47명은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에 놀랐으며, 송두율 교수에게 7년 징역형을 선고한 것에 대해 분개한다"라면서 송두율 교수의 즉각적인 사면을 요구하기도 했다.

'국가의 안전'을 전면에 내세우며, 학자의 저서를 비롯해 머릿속까지 국가보안법을 들이대는 것에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저술활동을 통해 북한을 위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송교수를 처벌한다는 판결 내용이 알려지자 독일 학계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에나 회자될 법한 냉전적 이데올로기에, 독일 언론들은 되살아난 망령을 목도한 듯 "매카시가 환영할만한 일"이라며 사법부의 판결을 비판했다.

학계의 역량은 학술적 오류나 잘못된 결론들을 자체적으로 얼마만큼 철처히 비판·검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단적이거나 남다른 발상은 지금까지 학문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 분단과 냉전이 만들어낸 '현실법'이 이 촉매제를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점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가장 뼈아픈 비판은 우리 체제가 여러 다양한 의견과 학문에 대해 관용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재외학자들의 주장은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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