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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실천이성의 신화
[딸깍발이] 실천이성의 신화
  • 이중원 서울시립대
  • 승인 2001.04.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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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30 17:38:56

미국의 한 윤리학자가 소비에트연방과 사회주의권이 붕괴할 즈음에, 만약 붕괴한다면 그 동안 사회주의권의 존재로 견제되어 왔던 인간의 탐욕과 욕구가 한층 증대할 것이고, 따라서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이성적·윤리적인 방안의 모색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견제세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전개될 자본주의적인 무한 경쟁이 필연코 자연파괴, 인간성 상실, 공동체적 위기 등을 가속화할 것이 자명하므로,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인 유지·발전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윤리적 차원에서 견제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종의 상생 원리로 보인다. 비록 사회주의적 이념이나 정치제도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가졌던 순기능적 측면을 최소한 윤리적 이성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이념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조차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이는 오늘의 현실이 잘 증언해 주고 있다. 더 이상 자본주의/사회주의, 좌경/우경 식의 케케묵은 이분법 논쟁은 현대 사회의 공동체적 위기를 해결하는데 전혀 쓸모가 없다. 개개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총체적·통합적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관·가치관이 필요하다. 분단체제 하에 있는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케케묵은 이분법 논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위험사회의 징후이다. 쟁점이 되는 사회적 문제에 동일하게 행해진 비판적 주장들이, 비판자 개인이 어떤 사회적 신념을 가졌는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는 없다. 잘못된 부분을 비판·수정하는 것은 이성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이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매체의 성향 또한 어떤 사상적 경향을 가진 사람의 글을 실었는가가 아니라, 그 누구이건 어떤 내용의 글을 실었는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가령 어느 진보적 사상가의 글이 어떤 보수적인 매체에 실렸다고 해서, 그 매체가 진보적인 매체가 될 수 없듯이….

사실상 이러한 논쟁 자체는 새로운 형태의 이성 창출은 고사하고 이성 자체에 反하는 행각들이다. 가령 일부 언론사의 친일행각 및 세금포탈을 꾸짖는 자의 입을, 그러한 문제제기와 아무 관련도 없는 좌경/우경이라는 구태한 논리로서 비이성적으로 틀어막으려는 행위처럼. 이는 일부 소수의 권력집단들이 자신이 처한 위기로부터 탈출하고자, 엉뚱한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이를 공격하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反이성의 늪에서 헤어 나와 이성으로 되돌아오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적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실천이성으로의 진화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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