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5:35 (금)
[한민의 문화 등반⑥] 한국은 저신뢰 사회인가
[한민의 문화 등반⑥] 한국은 저신뢰 사회인가
  • 한민
  • 승인 2021.02.02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적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 높은 기대 반영
한국인은 스스로 만들어낸 저신뢰 사회에서 살아가
한민 문화심리학자
한민 문화심리학자

 

한국은 저신뢰 사회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온 상식이다. 범람하는 사기 범죄, 국회, 법원 등 국가 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도, OECD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등 한국 사회의 낮은 신뢰도를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웬만한 학계에서는 한국의 낮은 신뢰를 주제로 학회 한번씩은 다 열어봤을 것이다.

정치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국가 경쟁력은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신뢰가 이렇게 낮으니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분명 형편없는 수준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0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3위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가 전세계 144개국을 대상으로 평가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신용영향점수(CIS) 등급은 1등급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2등급)와 일본, 이스라엘, 이탈리아(3등급)을 앞섰다. 

작년부터 진행중인 팬데믹 시국에서 한국의 방역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그동안 신뢰로운 나라의 대명사로 꼽히던 나라들의 일일 확진자 수나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방역당국과 의료인들의 숭고한 희생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그들을 믿고 방역지침을 따라 준 국민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가비교 통계 사이트인 넘베오(NUMBEO)에서 2018년 120개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해외 여행객들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한국이 뽑혔다. 한국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이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안전한 나라라고 말한다. 

관광지에 흔히 있는 소매치기도 없고 커피숍이나 식당에 가방이나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다. 지하철에서 놓고 내린 물건도 나중에 분실물 보관소에 가보면 웬만큼 찾을 수 있다. 간과하기 쉬운 점이 한국은 꽤 치안이 좋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날마다 살인과 강간, 아동학대 등 강력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지만 한국의 실제 강력사건 발생률은 세계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한국의 치안 수준은 신뢰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일까?

신뢰에는 두 차원이 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와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 한국인 심리를 연구해온 연구자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의 일반적 신뢰수준은 높은 편이나 기관 및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낮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우선 역사적으로 한국의 국가 시스템이 한국인들에게 행해왔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기억이 닿는 한 구한말에서부터 극히 최근까지 한국의 국가시스템은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었다. 망국과 식민지, 내전과 독재를 경험한 이들이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고 이만큼이나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사적 신뢰체계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같을 거라는 전제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도 많고 다른 이들과 가까워지기도 쉽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오해도 많고 속상할 일도 많다. 이러한 믿음체계가 커피숍에 노트북을 놓고 다녀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는 이유이고 사기범죄가 많은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내 노트북을 가져가겠어?’라는 생각으로 물건을 두고 다니고, 사기범들은 ‘저 사람이 설마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라는 사람들의 신뢰를 거꾸로 이용하는 것이다. 공적기관에 대한 낮은 신뢰는 거꾸로 그들에 대한 높은 기대를 반영한다. 한국사람들만큼 국회가, 법원이, 정부가, 기업이 신뢰롭게 작동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까.

높은 기대는 불행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지각된 현실, 구성된 현실이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저신뢰 사회 속에서 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로 한국은 점점 신뢰로운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적어도 국제적 지표들이 보여주는 바는 그렇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