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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4] 코뮌의 사회주의자와 우파 민족주의자가 함께 숭배한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4] 코뮌의 사회주의자와 우파 민족주의자가 함께 숭배한 아나키스트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3.01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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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조제프 푸르동④
만년의 프루동(1864)
만년의 프루동(1864)

1865년에 죽은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프루동처럼 생각한 사람이 그 앞에도 많았지만 누구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지도 자부하지도 않았다. 사실 지금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기에는 그 말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특히 한국에서 그렇다. 그만큼 한국은 국가주의, 관료주의, 제도주의, 민족주의, 집단주의, 연고주의 따위가 강한 나라다. 한국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인 신채호도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로 받들어진다. 제임스 스콧은 “우리 모두가 아나키스트다”라고 했지만 그 말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먹히기 어려울 것 같다.

프루동은 아나키를 무질서와 동의어로 간주한 그의 반대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다. 그의 유명한 격언들인 ‘재산은 절도다’, ‘아나키는 질서다’, ‘신은 악마다’ 등의 역설이 보여주듯이 그는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모순되는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작품은 광범위한 상반된 해석을 낳았다. 그는 또한 가장 다산인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40여권의 저술을 출판했고 14권의 서신, 11권의 공책, 그리고 많은 수의 미발표 원고를 남겼다.

프루동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항상 소화하지 못했고,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면서 체계적이거나 일관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질문이든 양쪽을 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종종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불확실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이 사회적 발전을 가져오고 인간의 자유를 확대할 것이라는 19세기의 자신감을 공유했다. 그는 자연과 사회가 발전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보고 인간이 그들과 조화롭게 살면 그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사회적 한계를 알고 있어야만 그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루동은 자신을 ‘과학적인’ 사상가로 간주했고, 정치를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체 철학은 영원한 화해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가 채택한 변증법은 종종 모순된 생각의 만족스러운 해결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나키는 바쿠닌이 아닌 프루동의 발명품

그의 스타일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과장된 말을 하고, 언제 멈춰야 할지 몰랐다. 반대자들의 조롱과 비평가들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의식이 강한 철학자였다. 19세기 중반의 많은 사회 사상가들처럼, 프루동은 사회이론과 철학적 추측을 결합시켰다. 그는 철학, 경제, 정치, 윤리,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는 정부, 재산, 성, 인종, 전쟁에 대해 터무니없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풍성하고 다양한 생산량 뒤에는 정의와 자유를 위한 최우선적인 추진력이 있었다.

『재산이란 무엇인가』를 낸 뒤 1840년, 그는 곧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침투적인 작품’이라고 부르며 ‘재산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이고, 활력 있고, 과학적인 고찰’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노동운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의 사상은 제1인터내셔널을 결성하는 데 일조했던 프랑스 노동자 계급을 지배했고 1871년 파리 코뮌에서 가장 큰 단일 집단은 프루동주의자들이었다. 바쿠닌이 마르크스와 결별하면서 아나키스트와 국가사회주의자의 방식을 구분한 후, 스위스에 기반을 둔 최초의 무장 아나키즘 단체는 “아나키란 바쿠닌의 발명이 아니라 프루동이 아나키의 참 아버지”라고 선언했다.

쿠르베가 그린 프루동의 초상화(1865)
쿠르베가 그린 프루동의 초상화(1865)

그리고 바쿠닌 자신은 ‘프루동이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정치투쟁 전의 경제투쟁에 대한 프루동의 강조와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하는 그의 협동조합 또한 그를 아나키생디칼리즘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프루동의 제자들은 프랑스 노동조합인 CGT(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낭 펠루티에(Femand Pelloutier)는 FBT(Federation des Bourses du Travail)에서 프루동이 제시한 상호주의 노선을 따라 노동자 계층을 교육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노조의 생디칼리즘부터 이탈리아 민족주의까지

프루동은 명실 공히 아나키즘 운동의 선구자였다. 프루동을 “아나키즘의 아버지”라고 부른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만이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도운 프랑스 노동자들, 1871년 코뮌의 지도자들, 1890년부터 1910년까지의 프랑스 노동조합의 생디칼리스트들은 프루동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프루동이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였다. 프루동은 프랑스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스페인의 연합주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러시아 사회주의자인 알렉산더 헤르젠은 프루동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재산과 정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충격을 받아 그를 찾았고, 프루동의 『전쟁과 평화』(1861)의 영향으로 같은 제목의 걸작을 썼다. 독일에서 그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40년대에는 라살레가 그 나라에서 프루동주의의 가장 큰 희망으로 여겨졌다. 미국에서는 특히 푸리에주의자들이 만든 브룩 농장의 찰스 다나, 그리고 윌리엄 그린과 벤자민 터커에 의해 그의 견해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그의 사상이 제1차 세계대전 전 생디칼리즘 운동에 만연했고, G. D. H. 콜의 길드 사회주의 버전도 그의 제안과 매우 흡사했다.

20세기에도 프루동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았다.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려는 그의 시도는 사회학의 창시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사상은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에 적용 가능한 사회주의 작가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는 ‘19세기 반혁명의 달인’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의 해방가’로 칭송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역사적인 아나키즘 운동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아나키즘, 우익의 도구로 좌초되다

그는 또한 소규모 소유주들과 프랑스 국익에 대한 그의 변호로 우파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숭배되었다. 가령 모리스 바레스는 프루동이 전형적인 프랑스인의 심성과 미덕을 가졌고 프랑스의 민족 정서와 헤겔주의를 잘 배합하여 독일의 집단주의나 러시아의 테러리즘에 굴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에게 만족과 흥미를 자아낸다고 했다. 또 악시옹 프랑세즈라는 우파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한 샤를 모라스는 프루동이 프랑스 정치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타고 난 반혁명주의자라고 찬양했다. 그런 반혁명주의자에는 프루동 외에도 발자크, 생트뵈브, 텐, 르낭, 공쿠르 형제 등이 있다. 프루동은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했다. 생시몽주의자들이나 푸리에도 반유대주의자였다.

프루동의 무덤
프루동의 무덤

이처럼 프루동은 그의 사상, 전술, 언어에 있어서 일관되게 아나키스트이지 않았다.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나 가부장주의는 아나키즘이나 평등주의와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물론 그런 것을 프루동 사고의 근간은 아니었다. 인간은 어떤 인종이든 색깔이든 우주의 주민이고 시민권은 어디에서나 획득된 권리라고 보는 것이 도리어 그의 사상에 맞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나키즘이 우파에 빠지거나 이용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음은 프루동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중하게 경계하고 비판해야 할 일이다. 특히 아나키즘의 역사가 일천한 아시아에서 그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특히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중국 혁명 과정에서 좌파가 아닌 우파로 전향했다. 한국에서도 박열이 해방 후 우파로 나아갔듯이 우파적 경향을 띄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프루동은, ‘권위를 질서의 적’으로 규정하고, ‘권위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공격하고 거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프루동은 추종자를 구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조직도 만들지 않았으며, 생애 대부분을 고립상태에서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들으며 지냈다. ‘권위는 질서의 적’이라는 그의 사상은 ‘소유와 경쟁은 전제적’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프루동에게 소유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소유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물론 프루동도 소유와 경쟁이 가지는 유효성과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소유와 경쟁이 ‘특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영국 노팅엄대·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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