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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공부,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공부, 더 나은 사회
  • 이다은
  • 승인 2021.03.26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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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작년 말 막 여성학 석사를 졸업한 내게 한국 여성학회에서 발표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 논문의 주제는 워킹홀리데이로 한국을 찾은 대만 여성 청년들의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이들의 한국 이동을 단순한 젊은이들의 ‘갭이어(gap year)’ 같은 문화체험이나 한류열풍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청년들이 겪고 있는 실업, 주거난 등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했다. 

발표를 마치고 토론자는 “내 연구에서 소개되고 있는 ‘헬조선’이나 한국의 청년 문제의 맥락이 대만 청년을 설명할 때에도 어느 정도 유효한지”, 그리고 “이 연구가 청년 문제 외에 어떤 여성학적인 함의를 지니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가 다른 학교에 가서 청강할 정도로 좋아하는 인류학자였다. 중국 사회와 청년, 빈곤, 노동 등의 사회문제를 깊게 연구해오던 그는 일찍부터 그 나라 밖의 사람으로서 다른 사회를 바라볼 때 주의해야 할 점, 그리고 자신의 연구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수 없는 고민을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코멘트를 듣자 논문 과정 내내 안개처럼 내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에 다시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인문사회 계열에 분과학문을 가로지르는 ‘학제간연구(interdisciplinary)’의 바람이 분 지 꽤 되었다고는 하지만 각 분과학문에는 각자 나름의 방법론이 있다. 여성학과는 정식 대학의 울타리 안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철학, 인류학, 사회학, 사학 등의 전공자가 함께 공부하는, 말 그대로 ‘다학제적’인 환경이다. 그렇다고 여성학과에서 방법론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 무엇보다 ‘연구 질문은 여성학적인가?’, ‘어떻게 내 연구가 현장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다. 여성학 석사 과정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괴롭게 하던 질문 역시 이 두 가지였다.

 

현장의 속도와 학문의 깊이 사이에서

 

첫 번째 질문은 단순히 ‘여성’을 주제로 했다고 여성학적인 연구가 아님을 의미한다. 또한 내 연구는 단순히 현장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의 문제를 드러내거나 개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여태 한 현상을 깊이 관찰하여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술하는 것, 혹은 그저 선생님이나 책이 주는 내용을 열심히 받아들이는 것이 ‘공부’ 혹은 ‘연구’라고 생각해온 나는 이러한 논쟁과 비판 작업이 낯설었다. 게다가 매일 새로운 젠더 이슈가 터져 나오는 한국사회에서 현장의 빠른 템포를 따라잡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돌아보자면 석사 시절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지금/여기’를 강조하는 빠른 현장감, 다학제적 분위기와 논쟁들 속에서 나는 나를 지탱해줄 명확한 학문적 방법론과 틀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여성학회에서 토론자의 질문은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 논문은 한국에 워킹홀리데이로 온 대만 여성 청년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지만, 대만에서 현지 연구를 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대만 문헌을 많이 참고하지도 못했으니 인류학, 지역학적 연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연구일까? 그것도 자신이 없었다. 그저 인류학, 사회학 등의 언저리에 애매하게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여성학적이라기엔 부족한 논문이 아닌지, 어떤 현장에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지, 또 한국인으로서 대만과 대만사람이라는 다른 사회를 볼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두서없이 쏟아지는 질문은 결국에는 어떤 틀과 렌즈를 가지고 연구 현장을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집결된다.

아직 위 질문에 나름의 힌트를 얻지 못한 채 나는 싱가포르국립대의 비교아시아연구 과정에서 새롭게 박사과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비교아시아연구 과정은 다양한 국적과 전공의 인문사회과학 교수들이 함께 모여 만든 다학제적 코스다. 자유롭고 넓게 공부한다는 재미가 있겠지만 여전히 나만의 방법론 탐색은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푸념 어린 고민이 오늘도 “현실에 어떻게 개입하여 기여할 것인가?”를 자문하며 끝없이 모래성을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초보 연구자들에게 반가운 고민 나눔이 되길 바란다.

 

 

이다은
이화여대 여성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위촉연구원이며 오는 여름부터 싱가포르국립대 비교아시아연구 박사 과정을 시작한다. 주로 아시아 청년들의 국경을 넘는 움직임, 액티비즘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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