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3:40 (금)
조선 후기 가집 편찬의 중요 분기점인 '청구영언' 장서각본 최초 역주
조선 후기 가집 편찬의 중요 분기점인 '청구영언' 장서각본 최초 역주
  • 김재호
  • 승인 2021.03.22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순회 (주해) , 이상원 (주해)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496쪽

『청구영언(靑丘永言)』 장서각본은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 가집 편찬의 특성을 두루 갖춘 가집(歌集)이다. 전반부는 18세기 중반 가집 편찬의 맥락을 재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며, 후반부는 가집이 전면적으로 악곡 체계 중심으로 재편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는 18세기 가집 편찬의 주요 흐름을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에서 『해동가요(海東歌謠)』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최근에 18세기 중후반에 편찬된 가집들이 다수 발굴되면서 이러한 이해 구도를 새롭게 점검할 필요가 대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서각본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 가집 편찬의 중요 분기점이자,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18세기 중반 가집 편찬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하며 18세기 후반의 가집 편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 나온 『청구영언 장서각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청구영언』의 원문 정본 텍스트를 확정한 뒤, 필사 당시의 누락이나 오기, 마모 등으로 원문 판독이 어려운 부분은 다른 가집이나 문집과 교감(校勘)하여 보완했다. 이어서 상세한 주석을 부여하고 현대어 풀이와 원전 영인(影印)을 실어 자료적 완결성을 갖추었다.

 『청구영언』 장서각본의 서지적 특성과 편제  

『청구영언』에서 ‘청구’는 우리나라, ‘영언’은 노래를 의미한다. 『청구영언』 장서각본은 필사본 1책으로, 표지를 제외한 총 46장(92면) 분량에, 크기는 25.3(세로)×15.4(가로)㎝이다. 종이는 닥나무로 만든 저지(楮紙)를 사용했는데, 목판본 시헌력(時憲曆)과 가사, 서간 등이 적힌 한글 필사본의 이면을 활용했다. 필사 시기는 표지의 마모된 간기(刊記)와 수록된 작품으로 추정할 때, 1814년 전후로 판단된다. 『청구영언』 장서각본은 18세기 중반 가집의 특징을 보여주는 전반부(1~255번)와 19세기 전반 가집의 특징을 보여주는 후반부(256~454번)로 구성된다. 특히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제가 다른 것으로 보아 최소한 2종 이상의 가집을 저본으로 삼아 재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교화가 아닌 치유를 꿈꾼 노래책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청구영언』 장서각본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김천택 편의 『청구영언』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18세기 중반 가집 편찬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하며 이후 가집 편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먼저 서두의 가론 및 본문의 구성과 작품 수록 전반에서 이 가집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이는 흐름이 일정하게 형성되었다. 『가조별람』, 『시가』(박씨본), 『영언』(이근배본), 『청구영언』(홍씨본), 『시여』(김씨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서발문과 가론을 함께 제시하고 있는 『해동가요』 계열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서발문 전통과 장서각본의 가론 전통을 동시에 수렴한 결과이다. 한편 『청구영언』 장서각본 서두에 제시된 가론의 경우, 주제별 분류 방식을 취함으로써 성격이 완전히 이질적인 『고금가곡(古今歌曲)』과 같은 가집에도 계승되고 있어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김천택은 노래를 시의 경지로 격상시키기 위해 당대 최고 문장가들의 손을 빌려 시가론을 전개했지만, 조선 후기 가집은 가론을 중시하면서 노래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한 『청구영언』 장서각본의 관점이 우세하게 펼쳐졌다. 즉, 『청구영언』 장서각본은 노래 자체임을 표방하고 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가무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서문과 발문을 싣는 대신 각종 음악 관련 정보를 최대한 보여주었다. 또 태곳적부터 노래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그 노래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지금 어떤 특성으로 존재하는지를 담아냈다. 이를 통해 『시경(詩經)』을 전범으로 삼고 노래와 시가 교화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김천택 편 『청구영언』의 논리를 거부하는 대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고심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