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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 등반⑨] 군중(群衆)은 무지한가?
[한민의 문화 등반⑨] 군중(群衆)은 무지한가?
  • 한민
  • 승인 2021.03.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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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

많은 사람들이 군중은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군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 뿌리는 프랑스의 귀스타브 르봉의 저서 『군중심리학』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르봉의 어록이다.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구미에 맞지 않으면 증거를 외면해 버리고 자신들을 부추겨주면 오류라도 신처럼 받드는 것이 군중이다. 그들에게 환상을 주면 누구든 지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이들의 환상을 깨버리려 들면 희생의 제물이 된다."

분명 르봉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군중의 특징으로 무의식성과 피암시성, 그리고 충동성, 변덕, 과민함을 꼽았다. 군중은 무계획적이고 자신도 모르는 욕구에 의해 움직이며 누군가의 어떠한 메시지에 의해 조종받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중에 대한 르봉의 생각은 '그래서 군중은 무지하고, 위험하다'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위의 짧은 인용문으로 군중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고 프로이트는 성(性)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르봉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혼란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학자다.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과 귀족 중심의 구질서가 무너지고 곧 시민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프랑스 혁명은 두 번의 쿠데타와 두 번의 혁명, 네 번의 전쟁을 거치며 왕정복고와 혁명이 반복된 혼돈을 지나고 나서야 마무리된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 한복판에서 르봉은 군중(群衆)이야말로 이러한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심 세력이라 생각했다. 르봉이 군중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면을 지적한 동시에,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군중의 힘과 가능성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에 군중이 개입하는 순간 이론가들이 예측하거나 계획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지만 결과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흐름이 된다. 마치 거대한 강물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하지만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결국 르봉이 강조한 것은 이러한 군중을 이해해야 할 필요다. 군중은 무식하고 멍청하니까 그들을 무시하자가 아니라, 그런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군중이 움직이는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군중심리학의 본질인 것이다.

군중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선동되기 쉽다는 식의 이해는 특히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크나큰 장애로 작용한다. 현대는 초연결시대, 새로운 군중의 시대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IT기술은 사람들을 모으는 거대한 광장이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는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여론이 날마다 요동친다. 

일부 지식인들만이 지식을 독점했던 18, 19세기의 군중들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21세기의 군중들이 같은 수준으로 무지하고 충동적이며 선동되기 쉬운 사람들일까?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들이 모두 진실은 아니며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성은 소위 전문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군중들은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거짓 정보에만 놀아나고 오직 전문가들만 제대로 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별로 이성적이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자신을 소위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그들 역시 군중의 일부라는 것이다. 군중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나 아닌 이들을 ‘군중’이라 범주화하는 습관은 매우 이분법적으로 어느 측면에서 보나 엘리트답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게다가 그들이 군중이라 폄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군중에 대한 이해지 내가 군중보다 잘났다는 근거 불명확한 자부심이 아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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