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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8] 세상에 지쳐버린 지리학자의 혁명시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38] 세상에 지쳐버린 지리학자의 혁명시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3.2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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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리제 르클뤼①

“슬펐다, 살아가는 일에 지쳐 버렸다”로 시작되는 책의 이름이 『산의 역사』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가 계실지 모른다. 저자는 계속 쓴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계획이 무산되고,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친구라던 이들은 초라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들떠 싸우는 인간들이 추해 보였다. 가혹한 운명이다. 그래도 어차피 죽을 것이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다시 기운을 내든 해야지, 마냥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선 시끌벅적한 도시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지평선 너머 울퉁불퉁한 봉우리들이 치솟은 높은 산으로 향했다.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해가 지면 뚝 떨어진 시골 여관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에 질려 버린 상태였지만, 혼자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새들의 울음이 구슬프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시냇물 소리와 깊은 숲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웅성거림도 더 이상 침울하게 들리지 않았다.“

 

 

『산의 역사』는 1880년에 나온 책이니 140년 만인 2020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셈이다. 저자인 엘리제 르클뤼(Élisée Reclus, 1830~1905)의 책으로는 처음으로 번역된 책이다. 번역서의 띠지에는 “그의 삶은 소설이고, 이 책은 시다. 산에 대한 가장 우아한 명상록이자 인문에세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지은이 소개에는 “현대 인문지리학의 선구자로 생태학이론과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그의 걸작 “『인간과 대지』 등 역시 20세기 사상사에 중요한 고전”이라고 하는데, 이런 저자의 책이 140년 만에 번역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역자 해설에서는 『산의 역사』가 소로의 『와추셋 산행』과 함께 산에 관한 고전으로 유명하다는데, 소로의 책이 대부분 번역되었는데도 『와추셋 산행』은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등산인구가 인구비례로 세계 1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한국에서 산에 대한 책은 인기가 없는지 모른다. 르클뤼는 특별히 산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산을 포함한 자연 자체를 사랑한다. 여기서 자연이란 야생의 자연 자체이다.

 

산으로 들어간 혁명가

 

그런데 르클뤼가 산에 들어간 이유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등에서 보는 소위 자연인들처럼 사업에 실패하거나 건강을 잃어서가 아니라 ‘혁명에 실패한 탓’이다. 그리고 그 혁명은 정치적 야망을 품은 풍운아의 그것도 아니다. 그의 혁명은 그런 정치가 조작한 세상을 자연처럼 바꾸려는 혁명이다. 그래서 그는 앞에서 말한 『산의 역사』를 쓰기 15년 전인 1865년에 쓴 『인간과 자연(L’Homme et la Na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생의 자연은 아주 아름답다! 그렇다면 자연을 장악한 인간이 새로 정복한 각각의 영역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저속한 건축물과 재산을 주사위처럼 반듯하게 경계 지어 자신의 소유로 표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156년 전, 35세의 르클뤼가 한 말이다. 당시에도 그는 산에 올라 자연을 내려다보며 쓴 것이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산 위에 올라 밑을 보면 참으로 저속한 건축물과 주사위 같은 농토는 물론 자연의 배를 가른 듯한 고속도로나 철도를 비롯한 직선의 길만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은 나에게 추악한 혐오의 도시일 뿐이다. 오래 전에 ‘삶을 예술처럼, 세상을 예술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모리스에 대한 책을 쓰면서 머리말에 쓴 서울은 추악하다는 주제의 이야기를 출판사에서 빼버린 적이 있다. 서울이 추악하지 않다면 그런 책을 일부러 쓸 필요도 없는 데 말이다.

 

 

모리스 책을 내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리스를 아시나요’라고 물었을 정도로 20년 정도 전에 그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르클뤼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가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리학자로서의 그에 대한 소개로는 1996년에 김재완이 쓴 『엘리제 르클뤼 사상과 그의 한국에 대한 기술』이라는 글 외에는 없는데 지리학 학술지에 쓴 그 글을 읽은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사실 지리학계에서도 그는 오랫동안 잊힌 사람이었다. 살아생전에도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프랑스 지리학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 어려웠다. 아나키즘에 관한 국내외 문헌에서 르클뤼에 대한 설명을 보기 어렵고, 인터넷에서 프랑스 아나키스트를 쳐보아도 르클뤼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그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취미는 가난, 아나키스트는 걷는 사람이어야

 

그러나 나에게 그는 무엇보다도 ‘걷는 사람’이다. 걷는 사람이 모두 아나키스트인 것은 아니지만 아나키스트는 걷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행기 일등석이나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호화 호텔에 묵는 아나키스트를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취미가 가난한 생활이라고 했고, 어떤 공직도 거부했다. 공직에는 작든 크든 반드시 전횡의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르클뤼는 루이즈 미셸과 생몰연대가 같고 함께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르클뤼는 1830년 프랑스 남부 보르도 부근의 시골인 셍프와(Sainte-Foy-la-Grande)에서 칼뱅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가톨릭이 주류인 프랑스에서, 그것도 시골에서 프로테스탄트 목사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처가는 루이 18세의 대신을 지낸 명문이므로 그가 원하면 고급관료로 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오로지 신앙의 길을 갔다. 교회에서도 출세할 수 있었지만 평생 피레네산맥 부근의 시골 마을 목사로 살았다. 게다가 그는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도 종교가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네브에서 신권정치를 한 칼뱅의 후예로 언제나 국가와 대치한 점에서 아나키스트와 통했다. 그는 1831년에 국가 공인의 목사직을 사퇴하고 공산주의자로 살았다.

그런 진보적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르쿨뤼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열 명이 넘는 형제자매도 모두 정치인이나 문학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열두 살 때부터 형 엘리와 함께 독일의 노이비트라는 라인 강 변의 마을에 있는 모라비아형제교회에서 자급자족의 청빈한 공동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민들이 모인 그 교회에서 민족간 배타주의와 권위주의가 횡행하는 것을 목격한 르클뤼는 2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 위해 칼뱅주의의 몽토방(Montauban) 신학대학을 다녔으나 1848년 혁명이 터지자 학교를 떠나 부근의 산맥을 넘어 지중해로 걸었다. 그 거리는 230킬로미터다. 시간당 4킬로를 걷는다면 56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하루 10시간을 걷는다면 6일이 걸리는 거리다. 그 뒤 그는 베를린대학교에 다녔는데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 다니던 형을 만나 부모가 사는 집까지 애견과 함께 21일 동안 788킬로미터를 걸었다. 하루에 38킬로미터를 걸은 셈이다.

 

링컨의 장려금을 거부하다

 

르클뤼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카를 리터(Carl Ritter, 1779~1859)에게 지리학을 배웠는데 리터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 1769~1859)와 함께 현대 과학으로 지리학의 방법론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여 ‘현대 지리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 1851년 12월,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반대해 관청을 점거해 항의한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칼뱅주의적 양육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종교를 거부한 르클뤼는 고드윈처럼 강렬한 낙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다. 21살에 그는 『세계에서 자유의 발전』(1851)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성숙한 사고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이 단계에서 프루동의 영향력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의 운명은 국가가 더 이상 정부나 다른 국가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완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부재다. 그것은 질서의 가장 높은 표현인 아나키 상태다.”

 

 

그리고 영국, 미국, 중앙아메리카 및 콜롬비아에서 6년(1852~1857)을 농사와 지리조사, 그리고 코뮌 만들기로 보냈다. 그 6년 동안에도 그는 엄청난 거리를 걸었고 선주민의 생활과 대륙의 지형에 압도되었다. 돈을 벌기 위해 프랑스어 교사를 하기도 했으나 노예제와 교회와 이민자 도덕을 혐오하여 미국을 떠나 콜럼비아로 갔다. 교회는 흑인 노예 소유를 인정하고, 흑인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이민자의 도덕은 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중남미에서는 시에라 네바다의 거대한 농장을 사서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으나 협동조합의 실패 등으로 여의치 않아 1857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856년에 사면을 받고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고 프랑스 선장과 세네갈 여성의 딸 클라리스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 르클뤼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여행 안내서를 만드는 서점에 취직해 「시에라 네바다 여행」을 비롯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즉 <철학평론>에 실은 ‘유럽 토지의 역사’를 비롯하여 <양세계평론>에 정치와 지리 분야의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그가 쓴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글을 링컨대통령이 읽고 그에게 장려금을 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르클뤼는 그 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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