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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의 문화 등반⑩] 나무꾼은 성범죄자인가?
[한민의 문화 등반⑩] 나무꾼은 성범죄자인가?
  • 한민
  • 승인 2021.03.29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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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

어렸을 때 듣고 자랐던 전래설화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에 대한 재평가가 있는 모양이다. 선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범죄자라는 설이다. 고모를 졸라 몇 번씩 듣고 잠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사실은 끔찍한 성범죄자의 행각이었다니 사뭇 모골이 송연해진다. 

언젠가는 한 고등학교에서는 국어교사가 고대가요 「구지가」를 설명하다가 성희롱 혐의를 받고 징계를 받는 일도 있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에서 거북이 머리(龜頭)가 남성 성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발언이 문제였다는데 이쯤 되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최근 양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과거를 전반적으로 재평가하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헐리우드에서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 전통적 여성상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는 비판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반영한 영화들이 제작되고 있다. 
물론 현재 한국의 성평등 수준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으며, 문화는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의 가치를 현대에 재해석하는 것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고대의 기록은 사실의 기술이 아닌 원형(元型)과 상징이다. 심청전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심청의 효심이지 인신매매가 아니며 별주부전의 거북이는 충(忠)의 상징으로 봐야지 사기로 남의 장기를 훔치려는 범죄자가 아닌 것이다. 

물론 고전에 대한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원형과 상징이란 원래 해석하는 것이다. 원형의 재해석은 새로운 창조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백설공주」를 재해석한 「스노우화이트 앤 헌츠맨」이 그렇고, 「흥부전」을 재해석한 「흥부, 글로 세상을 바꾼 자」가 그렇다. 

「선녀와 나무꾼」도 날개옷을 도둑맞고 나무꾼과 결혼하게 된 선녀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 재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으므로. 그러나 특정 해석을 바탕으로 이게 인권문제가 있으니 사회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접근이다.

그렇게 따지면, 서양문화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신화는 근친상간과 불륜, 납치와 강간 등 온갖가지 성범죄로 점철되어 있다. 제우스만 해도 아버지를 죽이고 누이와 결혼하고 밥먹듯 남의 아내와 처녀들을 범했으며, 포세이돈은 아테네의 신녀를 강간했고 하데스는 조카를 납치해 결혼했다.

서양문화의 또 다른 한 축인 성경에도 심각한 성범죄들이 넘쳐난다. 소돔에서 탈출한 롯의 두 딸은 아버지와 동침했고 다윗왕은 부하를 사지에 몰고 그 아내를 취했으며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며느리와 잠자리를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에서 얻는 것이 고대의 신들과 위인들이 희대의 성범죄자라는 사실이 전부일까. 분명 그들의 행각은 현대의 시각에서 성범죄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로마신화나 성경을 금지하자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옛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옛사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사상과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보다 나은 삶을 누리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 설화와 같은 고대의 기록은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환경과 조건을 반영한다. 우리는 과거의 유산을 통해 과거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그들이 신봉했던 가치, 품었던 욕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과거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과거의 이야기들은 많은 상징과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으며, 재해석되고 재창조되어 현대 사회를 풍부하게 하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가치에 빗대어 과거의 가치는 잘못되었으니 그것들을 모조리 부정하자는 주장은 과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 문화의 힘과 창의력이 요구될 미래는 그렇게 빈곤한 역사의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맞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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