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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염승섭 전 계명대 교수를 기리며
故 염승섭 전 계명대 교수를 기리며
  • 안삼환
  • 승인 2021.04.02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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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 '故 염승섭 교수님 영전에 삼가 드리는 글'
"우리의 대화와 토론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지난 3월 19일, 염승섭 전 계명대 교수(독문학)가 영면했다. 향년 83세. 고 염승섭 교수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라이스대(휴스턴)에서 박사를 했다. 1986년부터 재직하던 계명대에서 2003년 정년퇴임을 맞았다. 『횔덜린 삶과 문학』, 『인문학과 해석학』 등을 썼으며, 『어디에도 설 땅은 없다』(크리스타 볼프), 『변신』(카프카 단편선) 등을 옮겼다.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독문학)가 ‘故 염승섭 교수님 영전에 삼가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원들과 나눴던 弔辭를 전해 왔다.
 

 

고 염승섭 전 계명대 교수의 저작
고 염승섭 전 계명대 교수의 저작

존경하옵는 염승섭 선생님,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부음에 접하여 너무나 놀란 나머지 참으로 황망해서 저는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접한 소식이라서 저로서는 유명(幽冥)을 달리한 사실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만 해도 전화 통화 중에, 이 비루한 팬데믹 시절이 끝나면, 곧 다시 만나 우리가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시고선, 어찌 이리도 빨리 떠나가셨는지요? 

이 세상을 하직하신 방식 또한 우선 듣기에는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댁 앞에 있는 정원의 봄 수풀 아래에서 운명하신 채 발견되셨다 하니, 아마도 병원으로 가시고자 댁을 나서셨다가 호흡이 곤란하셔서 잠깐 정원 안으로 들어가 쉬시고자 하셨던 것인지요?

코로나 사태 등 여러 가지 개인적 사정 때문에 제가 죄송하게도 장례에 참석하지는 못하고, 여러 통의 전화를 해 가면서, 영혼은 이미 떠나버린 선생님의 육신이 가시는 길을 도와드리고자 했습니다만, 그 사이에 여러 차례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장례식 현장에 제가 물리적으로 부재했던 사실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도 계명대 신일희 총장님을 비롯한 대구의 여러 동학님들께서 늦게나마 아시고 조문과 뒷수습을 잘 해 주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비록 장례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선생님께 실로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존경심과 깊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생님도 잘 아셨지요? 그것은 선생님께서 늘 우리 독문학을 사랑하셔서, 우리 학문과 관련이 있는 여러 학회의 행사에 꾸준히 나오시고, 항상 겸허하고도 진솔하신 태도로 토론에 참여하심으로써 우리 후학들에게 크나큰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학술발표회가 다소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던 우리 학회에 올바른 토론 문화가 새로이 정착하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도 선생님의 공로가 컸다고 판단합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께서는 박학다식하셨습니다. 영어, 독어, 불어는 물론이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도 능하시니, 독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말라르메, 보들레르, 단테, 히메네스 등등 서양문학 전체를 다 꿰고 계셨고,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등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두루 수용하셨으므로, 늘 종합적인 안목으로 올바른 학문적 인식을 우리들 후배들에게 설파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서울 걸음 하실 때마다, 제가 낙산 꼭대기의 누옥 도동재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숙식을 함께하며 보낸 시간들은 이런 정신적 대화의 장이었기에 저에게는 참으로 감명 깊고 소중했습니다.

독일 이상주의에 관한 우리의 대화와 토론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시니, 무엇이 그렇게도 급하셔서 이리도 빨리 가셨는지요? 저로서는 허무한 마음 달랠 길 없고, 선생님이 알고 계시던 그 많은 외국어 단어들과 그 해박한 문학적, 철학적 지식을 어디 외장 메모리 스틱 같은 데에라도 담아놓을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의 소우주를 잃은 것입니다.

떠나신 지 며칠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 보자니, 선생님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신 방식 자체까지도 너무나 천재적이십니다. 학자로서 객지에서 혼자 연구하시고 외국 작품을 번역하시다가 만약 댁 안에서 돌아가셨더라면, 저희들이 선생님의 서거 사실을 빨리 발견을 못 해서 낭패였을 터였고, 설령 무사히 병원까지 가셨다 하더라도 입원과 치료, 간병 등 모든 일이 실로 간단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고귀한 정신적 존재이셨던 선생님께서는 이 ‘비루한 비루스(Virus)’의 시절에 육신을 가장 적절하게 내버리시고 엔텔레키아만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신 듯합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선생님을 따라가야 할 저로서는 그 가벼운 비상(飛翔)에 은근히 부러움조차 느끼게 됩니다.
부디 천국의 아르카디아에 평안히 정주하셔서 계속 책을 읽으시면서 행복한 사유를 지속하시기를 빕니다.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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