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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도 ‘친일’도 상품이었던 일제강점기 언론史
‘민족’도 ‘친일’도 상품이었던 일제강점기 언론史
  • 박강수
  • 승인 2021.04.05 08: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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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_『조선∙동아일보의 탄생』 쓴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학)의 첫 ‘언론사(史)’ 연구 논문은 2005년 <역사비평> 70호에 수록됐다. 제목은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와 조선∙동아일보의 선택」이다. 16년 전 논문에 장 교수는 이렇게 썼다. “민족지나 친일지라는 규정은 2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의 변화를 간과할 뿐 아니라 신문사를 시종일관된 ‘정치결사’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 주장은 모두 성격을 미리 규정한 뒤에 그에 맞는 사료를 찾은 듯 하다. 결국 서로 소통하지 않는 주장만 난무하게 된다.”

조선∙동아일보는 친일언론인가. 장 교수가 보기에 이 질문은 어떤 대답을 하든 일정 부분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묻는다. “두 신문의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어떤 동기와 선택이 그들을 친일로 이끌었는가.” 그가 배제하고자 한 것은 ‘친일과 항일(민족) 신문’이라는 이분법 프레임이다. 두 가지 정체성은 역사 속에 혼재돼 존재했고 관건은 그 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성실하고 끈질긴 16년간의 규명 작업이 책으로 묶여 지난 1월 출간됐다.

동아일보 창간일(4월 1일)과 신문의 날(4월 7일)을 앞둔 지난달 29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장신 교수를 만났다. 그는 “취미 삼아 해온 연구가 20년 쌓이니 언론사(史) 전문가가 됐다”며 웃었다.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학)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에서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사진=박강수
장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사학)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에서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사진=박강수 기자

 

△ 지난해(2020)가 조선∙동아 창간 100주년이었다. 어떻게 봤나.

“자신들의 ‘100년사(史)’를 어떻게 정리할지 기대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50년사’부터 10년 단위로 사사(社史)를 써왔다. 새로 공개된 자료나 비판에 대한 대응 논리가 궁금했는데 막상 100년사를 보니 더 퇴보했더라. 조선일보 사사의 정점은 ‘80년사’였다. 당시 안티조선 운동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그만큼 욕도 먹었는데 그때 논리를 그대로 썼다. 80년사 보면 조선일보가 항일도 많이 했다면서 신간회를 띄운다. 그런데 사실 방응모는 그 멤버들을 다 쫓아내고 조선일보를 장악한 거다. (사사가) 잘 안 맞는다.

동아일보는 사사를 못 냈다. 김성수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김성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내부적으로 정리를 못한 거 아닐까 싶다. 워낙 김성수를 내세워 브랜드로 삼아 왔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된 거 같다. 실망이 컸다. 그 사사를 대체하고 싶어서 논문을 쓰고 책을 낸 것이기도 하다.”

 

△ 창간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1920년대 초 한반도의 언론 지형은 어떠했나.

“1910년대에는 언론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매일신보, 경성일보 같은 총독부 기관지와 지방의 일본인 어용 신문들만 있었다. 조선인들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고 총독부로서도 조선인 여론을 청취할 창구가 없었다. 기껏해야 수사나 헌병 보조원들이 주막 가서 사람들 말 엿듣고 정리하는 식이었다. 3.1 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총독(사이토 마코토)은 일본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조선인 여론 청취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허용한다. 단, 세 매체만 허가했다.”

 

△ 어떤 매체들인가.

“첫 번째는 확실한 친일파. 20년대 문화통치의 핵심이 새로운 친일파를 양성하는 거였다. 이완용 같은 옛날 친일파는 도움이 안 되니 새로운 아이디어와 논리로 무장한 신 친일파에게 적절한 권력과 부를 분배해 포섭하고자 했다. 그게 국민협회의 <시사신문>이다.

다음이 대정친목회. 대정친목회는 사교를 위한 융화단체다. 일본인과 잘 지내면서 조선인 수준도 높여야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룹으로 대부분 기업인이다. 이들이 경제신문을 만들도록 한 것이 <조선일보>다.

그리고 <동아일보>. 어쨌든 정치적 불만을 터뜨릴 곳이 필요했다. 사장은 박영효(초대 동아일보 사장)처럼 일본과 타협, 거래가 가능한 사람을 두고 실제 데스크는 20대 유학생들이 맡았다. 겁 없는 젊은이들이 모든 걸 쏟아 부어 만드는 신문이었다. ‘2천만 민중의 표현기관’ 외치면서 조선 민족을 대변하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신문도 잘 만들었다. 독자들이 원하는 내용을 정말 잘 썼다.”

 

 

△ 예를 들면?

"일단 총독을 까야 한다(웃음). 조선 독립 얘기를 해야 하는데 대놓고는 못 한다. 총독부와 ‘밀당’하는 시기였으니까. ‘에둘러 치기’를 했다. 아일랜드나 이집트 독립 문제, 인도 독립 운동 얘기하면서 훈수를 둔다. 결국 우리 이야기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독립을 선동하고 총독 정치에도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총독부로서도 이게 조선이 독립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국제 정세 분석인데 찝찝하긴 하지만 별 수 없는 거다.

또 하나는 내부 문제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사상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사상과 결별해야 하는가. 핵심은 유교였다. (동아일보는) 유교에 대해 아주 격렬하게 비판해서 젊은이들에게 환호성을 받았다. 반면 조선일보는 편집도 조금 갑갑했지만 유교에 대해서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동아일보가 히트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 다해주는 거였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무리하게 된다.”

 

1920년대 초기 조선일보는 30건의 기사 압수, 23번 발매∙반포 금지와 두 차례 정간을 당했다. 같은 시기 동아일보보다 잦은 탄압을 받았다.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에서 경영하는 매체가 가장 항일에 적극적이었던 걸까. 오래된 딜레마다. 장 교수는 이를 ‘영업용 항일 신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의제 설정과 영향력에서 동아일보에 밀린 조선일보가 더 강하게 일제 비판에 나서다가 수위 조절에 실패해 총독부와 관계마저 그르쳤다는 설명이다. 실제 동아일보보다 거친 비판을 쏟아냈던 조선일보는 먼저 정간에서 해제됐다. 여전히 총독부의 타겟은 동아일보였던 것이다. 압수되고 발매 금지 당한 조선일보와 달리 세련되게 검열을 피해 독자를 만난 동아일보의 영향력은 날로 커졌다.

 

△ 조선∙동아일보의 정체성은 고정돼 있지 않았던 거 같다. 20년대 중반 동아일보에서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가 좌절되면서 조선일보로 기자들이 대거 옮겨간다. 이때는 위상이 바뀌었나?

“맞다. 동아일보는 확실한 민족주의 그룹이면서 지주 자본가들이 주식으로 장악한 상태였다. 총독부에서도 나름 말이 통하는 조직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조선일보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일보에 많이 들어갔다. 이건 당대 사회운동과 맞물린 부분인데 1923년부터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산주의가 사회운동 주도권을 잡는다. 청년총동맹, 노동총연맹,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 등 전국 대중 조직을 다 장악했다. 여기에 ‘말 안 듣는 민족주의자들’ 안재홍, 이상재 등이 결합하면서 조선일보가 신간회 기관지처럼 된다.”

 

△ 식민조선 언론의 ‘황금기’라고 볼 수 있을까?

“20년대가 황금기다. 다만 돈은 별로 못 벌었다. 동아일보는 월급을 확실히 줬는데 조선일보는 당시 사장들이 맨날 기자들한테 멱살 잡혔을 정도다(웃음). 월급 내놓으라고.”

 

1940년 신년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천황가 부부의 사진 등이 실렸다.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뉴스타파 유튜브 캡처
1940년 신년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천황가 부부의 사진 등이 실렸다. 지난해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뉴스타파 유튜브 캡처

 

△ 문제는 30년대다. 1937년을 기준으로 조선∙동아일보가 매일신보에 맞먹는 친일지로 돌아서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일단 총독(미나미 지로)이 바뀌었다. 문화통치 시기와 달리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와중에 ‘일장기 말소 사건’이 터졌다. (총독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거다. 탄압의 빌미를 줬으니까. 여기가 문제다. 과거 같은 민족지라면 저항하다 장렬히 산화했어야 하는데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왜 그걸 못 했나. 그게 사람들의 고민인데 ‘원래부터 친일파여서 그랬다’ 그러면 얼마나 쉽나. 그런데 그건 재미가 없지. 선행 연구를 많이 참조했다. 상지대 박용규 선생 박사논문에 잘 정리돼 있다. 20년대와 30년대 기자상이 달라졌다는 거다. 20년대는 ‘지사형’, 30년대는 ‘월급쟁이’. 신문사가 기업화된 셈이다. 특히 방응모가 조선일보 사장이 된 이후(1933년)부터 더 심해진다.”

 

△ ‘언론에서 기업으로’(『조선∙동아일보의 탄생』의 부제다)인가?

“20년대 중후반부터 조선∙동아일보의 일본 상품 광고 비중이 50~60%로 올라갔다. 광고로 신문 경영을 안정시켜야 하니 압수나 정간을 피해야 했고, 신문이 무사히 나오게 하려면 총독부 검열 받기 전에 내부 검열을 강화해야 했다. 편집국장과 데스크가 그 역할을 한다. 다만 그렇게 하면 조선인 독자들은 싫어한다. 구독자가 떨어지면 광고에도 제약이 온다. 비판하면서도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 30년대 초반 상황이다.”

 

△ 30년대 후반 조선∙동아일보는 적극적으로 동조했음에도 총독부는 이들을 폐간시킬 계획을 세웠다.

“1938년도 총독 훈시를 보면 ‘정말 신문 좋아졌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마음에 든다는 거다. 다만 전시체제라는 게 컸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 조달 명분으로 일본에서부터 신문 통폐합에 들어갔다. 또 조선∙동아일보가 아무리 친일화됐다고 해도 가지고 있는 브랜드, 한때 민족을 대변했다는 상징이 존재한다. 전시체제에서는 후방의 인식이 일사분란하게 통일돼야 하는데 조선어 지면이나 문화면 통해서 조선인 정서, 문화를 유통시키는 방식이 남아 있으면 곤란한 거다. 총독부는 그런 걸 확실하게 뿌리 뽑고 싶어 했다.”

 

사진=박강수 기자
사진=박강수 기자

 

△ 폐간 과정에서 대응에도 조선∙동아일보는 차이가 있다. 우선 방응모가 적극적으로 먼저 폐간협상에 나섰던 이유는 뭘까?

“방응모는 기업인이다. (방응모가 보기에) 총독부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버틴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해 최대한 얻어내자는 입장이었고 다만 ‘동아일보랑 같이 폐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신문사도 과거 명성이 있으니 먼저 항복해버리면 내부 반발도 클 것이고, 이익은 최대한 얻어야 하는데 (동시에) ‘면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동아일보가 거절할 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걸었다’고 적극 해석할 수도 있는 조선일보가 안 써먹더라(웃음).

결국 조선일보는 원하는 걸 다 얻었다. 월간잡지 남았고, 출판부 남았고, 반대 급부도 얻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이미 일장기 말소 사건 때 많이 뺏겼다. 조선일보는 천황가의 주요 의식 있는 날이나 육군 기념일, 해군 기념일 같은 당대 중요한 날마다 매일신보 따라서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렸다. 총독부에 ‘우리는 당신들이랑 같이 간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안 올렸나.

“동아는 한번도 안 올렸다. 조선일보는 확실하게 ‘어떻게 하는 것이 이익인가’를 따지지만 동아일보는 나름대로 끝까지 개기는 게 있었다(웃음). 동아 그룹은 기본적으로 일본 유학파 엘리트였다. 조선 총독부 고급 관료들하고도 말이 통했고 폐간 압박 받을 때도 로비할 창구가 있었다. 20년대에 관계 맺은 총독부 고관들이 일본 가서 만든 로비 단체 ‘중앙조선협회’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통치 실적도 좋았다고 여기고 조선에 이권도 많다. 어느 정도 식민지의 이익을 방어해야 했다. 동아일보 핵심들이 여기랑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반면 방응모는 그런 게 없었다. 방응모는 학벌도 없고 광산 재벌 출신이다. 당대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계속 무시 당했다. 한설야가 쓴 『세로』(1941)라는 소설을 보면 누가 봐도 방응모인 이야기가 나온다. 사장이 당대 일류 지식인인 기자들 앞에서 열심히 준비해 신년 연설을 하는데 기자들이 막 비웃는다. 1933~34년 시점의 조선일보 내부를 잘 보여준다.”

 

△ 책이 나왔을 때 언론에서 잘 안 다뤄 준 것 같다.

“아예 안 다뤘다. 조선일보는 처음 논문 나왔을 때부터 무시했다. 동아일보 같은 경우는 김성수 재판에 증인으로도 들어갔고 김성수가 반민족 행위 판결 받는데 제 논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선∙동아는 저를 싫어할 수박에 없다(웃음). 한겨레나 경향에서 안 다뤄준 것을 주변에서 섭섭해 하던데 사실 작년에 뉴스타파에서 많이 다뤘고 거기 제 논문이 거의 다 인용돼 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

 

△ ‘방응모 평전’을 쓰고 싶다고 했다.

“사람 자체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자료는 다 있는데 아직 못 쓰고 있다. 평전이니 평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 평가를 못하겠더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기준이 흔들리고 있어서. 정년 전에 쓸 수 있을까 고민이다. 그 전에 1932~33년 사이 조선일보 운영과 경영을 둘러싸고 경합하고 이합집산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 이들이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지, 이념이 아니라 각자와 생활과 앙금을 바탕으로, 소설처럼 쓰고 싶다. 이건 준비가 다 돼 있다.”

 

△ 조선일보에서 고마워해야 할 거 같다.

“맞다. 조선일보 사사를 거의 다 밝혀주고 있으니(웃음).”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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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4-05 09:41:37
한국은 수천년 유교나라일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