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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섰던 철학의 귀로
거리로 나섰던 철학의 귀로
  • 김만권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
  • 승인 2021.04.2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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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김만권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정치철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개인적으로는 큰 결심을 했다. ‘굳이 교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진 않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시민교육이다.’ 정치철학 전공자지만 정치보다는 철학에 훨씬 더 가까운 공부를 한 나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박사과정 동안 배운 ‘philosophy as a way of life’,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이란 방법론은 내게 꽤나 소중했다. 나는 철학을 삶의 방식으로 삼고 싶었다. 무엇보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철학의 주춧돌을 놓은 소크라테스는 내가 닮고 싶은 철학자의 전형이었다. 철학은 교실이 아니라 거리에 있어야 했다.

물론 학교와 모든 인연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민교육만으로는 필요한 빵을 얻을 수 없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학교는 필요한 곳이었다. 뉴욕에서 3년 넘게 매학기 3과목씩 강의했던 경험은 큰 자산이 되었고, 게다가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만나는 학생들마다 내게 친절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동료들이 힘겨워하는 시간강사 생활이 나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시간강사 생활로 생계의 한 쪽을 이으며 거리로 나가 만난 세상은 새로운 배움터였다. 전국 어디라도 부르는 곳이라면 시간을 맞추어 찾아갔다. 그게 땅 끝이라도, 소위 차비가 나오지 않는 곳이라도 갔다. 나의 철학이 찾아가야 할 데는 그런 외진 곳이었다. 어디를 가든 만나는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그 분들의 삶을 배우려 했다. 그 삶을 알아갈수록 내가 공부했던 것들이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들을 몸으로도 하나씩 이해할 수 있는 계기들이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생활이 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학문하는 동료들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학문하는 사람에겐 같이 학문하는 동료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적어도 내 경험 안에선, 학자가 거리로 나갔다는 것이 활동가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리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학문의 주제를 얻고, 학문한 내용을 거리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옮긴다는 것에 더 가깝다. 그 과정에서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학문으로서 내 언어가 더 정교해져야만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더 쉽게, 더 명료하게 거리의 언어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언어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것은 나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학문하는 동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돌아보면 박사과정을 끝내기까지 내겐 늘 학문하는 동료들의 도움이 있었다.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내겐 지도교수님과 동학들이 있었다. 지도교수님은 내게 늘 새로운 논문과 책들을 주고 학문적 질문을 던졌다. 지금 내 전문분야가 된 기본소득도, 기초자본도 지도교수님을 통해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알고 있었다. 더하여 대학원에는 치열하게 온갖 주제를 두고 논쟁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다. 궁금한 게 있고 토론해야 할 게 있다면 그 동료들과 마주 앉으면 됐다. 박사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온 동료들과 나누는 치열한 논쟁은 내 학문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게 학교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거리로 나온 이후엔 학문적으로 치열하게 논쟁할 동료들이 ‘곁에’ 없었다.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5년이 넘어가자 동료들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졌다. 학문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매일매일 깨달았다. 결국 학문하는 동료들을 찾아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에 학술연구교수가 됐다. 이곳의 경험은 내가 바라는 그대로다. 각자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현장 형 학자들이 모인 이 곳은 내게 새로운 배움터다. 나누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배움이 되어 돌아온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듯,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이는 나 자신이 아니라 늘 우리의 동료들이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둠에 갇힐 때, 동료들은 말 한마디로 빛을 밝혀준다. 학문에서 출발한 내가 거리에서 무엇을 하든 좋은 모든 것들은 좋은 학문에서 나온다. 바로 좋은 학문은 늘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것이다.

 

 

 

 

김만권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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