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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틈새와 파편의 글쓰기
에세이, 틈새와 파편의 글쓰기
  • 강민규
  • 승인 2021.04.21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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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책들_『미니마 모랄리아』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도서출판 길 | 347쪽

체계 공고함을 주관적 경험이 분쇄
경시된 가능성에의 감응이 관건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아도르노가 미국 망명 중에 쓴 에세이 모음집이다. 물질적 생산의 부속물이 된 삶을 성찰한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은 같은 시기에 나온 『계몽의 변증법』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서구 문명의 야만과 퇴행이 처음부터 계몽의 개념에 그 계기를 두고 있음을 『계몽의 변증법』이 밝혔다면, 여기서는 그 문명이 개별자를 대체 가능한 원자 또는 기능으로 환원시키는 자동화된 메커니즘으로 치닫고 있음을 주로 입증해 보인다. 

이 책은 마니아 독자들이 많다. 아마도 무게감 있는 이론을 주관적 경험의 층위에서 구체화한 에세이 형식의 힘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철학과 예술이라는 자신의 주 관심 영역과 함께 지식인의 태도, 대인 관계, 소비 풍토, 대중문화 등 다양한 영역들에서 사유를 펼친다. 사회의 억압적인 전체성이 국가를 가리지 않고 관철되는 사태를 통찰한 이 사유는 특히 개인의 경험, 감정과 잘 조응됨으로써 공감을 얻는다.

찬찬히 읽어 보면 이 에세이 형식이 궁극적으로는 다음의 두 효과를 노리고 있음이 어렵지 않게 간파된다. 첫째, 에세이는 전체성이나 보편자의 부당한 강요에 응전하는 효과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기능한다. 「형식으로서의 에세이」(Der Essay als Form)에서 저자는 총체성과 연속성을 강조해온 기존의 사유가 오히려 대상의 본질에 맞지 않다고 본 바 있다. 현실 자체가 틈이 많고 파편화되어 있다면 그에 관한 글쓰기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는 대상의 총체성을 섣불리 주장하기보다는 틈새와 우연성에 착목하고, 따라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기 성찰을 통한 정진을 지향한다. 다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저자가 그러한 글쓰기를 온전히 실천하지 못한 것 같다. 아포리즘 스타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마틴 제이, 『변증법적 상상력』), 사회 비판의 일관적인 메시지가 사실상 글들의 단편성을 상쇄하고 있으며 문체상의 변격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둘째, 개인의 삶을 전경화하는 에세이는 전체성으로부터 개별성을 구출해내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이는 헤겔을 비판하며 쓴 서두(헌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상호 작용으로 실현되며, 전체주의적 통일성을 분쇄할 힘은 개인의 경험에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사적인 경험을 단초로 삼아 지평을 확장해가는 글쓰기는 여기에 잘 어울린다. 계산적으로 분화된 노동 기능들이 횡행하는 호텔과 병원, 교환 가치와 실증성을 중심으로 물화(物化)되는 인간관계 등에 관한 경험은 그 자체로 ‘체계’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다. 아울러 한 구석에서는 “역사의 운동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 동화책, 음악, 장난감 등의 소재들이 해방의 잠재력을 머금은 것으로 그려진다. 

경시된 가능성에의 감응이 관건

아도르노가 목격한 미국의 사회상은 전 세계의 표준처럼 되어 왔고, 생산 및 사회적 관리 기술의 발달에 편승하여 그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 형식은 지금도 적지 않은 시사를 준다. 체계의 공고함 아래서 주관적 경험이 여전히 주목되어야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개인을 표현하는 경로가 과거보다 다양해지기도 했다. 망명자 아도르노의 사유 속에서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실제로 곳곳에서 말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에세이의 단초가 될 만한 경험들이 다종다양해진 개별자들로부터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표현 언어의 다채로움으로도 연계될 가능성이 있다. 말하는 자가 많아지고, 매체 기술의 발달로 말하는 방식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1940년대 에세이의 형식적 빈곤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성급하게 낙관하기는 어렵다. 저자의 글들에 감도는 비관적 기운은 세계의 본질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파편적이고 주관적인 표현들이 승화되지 못한 채 파편으로만 머무르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전기(轉機)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에서 마련될 텐데, 머무르는 곳마다 국외자였던 당시의 아도르노와 달리 내부자로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 인식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의 내부에서 발화되고 있는 “비스듬한 것, 불투명한 것, 붙잡히지 않는 것”들에 얼마나 예민하게 감응하느냐가 관건이 된다. 언제나 주변에 있었지만 무시되곤 했던 그것들을 용케 캐내어 물고 늘어지는 것, 우리 시대에 아도르노 식의 에세이가 가능하다면 출발은 그런 태도로부터일 듯하다.

 

 

강민규 
강원대 교수·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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