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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경향―조선 유학이 남긴 유산, 氣學
연구 경향―조선 유학이 남긴 유산, 氣學
  • 김시천 숭실대
  • 승인 2004.09.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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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과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팔방미인

“氣란 무엇일까.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아마도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하는 까닭은 그들에게는 기가 설명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연과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는 서구문물의 유입 이후 太極, 天, 道, 理처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쓰였던 동양의 많은 개념들과 함께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필자 등이 여러 선배 학자들과 함께 엮어낸 '기학의 모험'이란 책의 서두에 나오는 김교빈의 말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이미 퇴색해 버린 유물을 앞에 두고 단순히 자조하는 말뿐인 것은 결코 아니다. 氣學이란 말은 그 유래 자체가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氣가 전통 동아시아 철학과 과학의 핵심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氣를 학문의 대명사로 선언한 것은 19세기를 살다 간 조선의 철학자 최한기의 고유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서구 문명의 총아였던 과학에 정열적인 관심을 보였고, 서구 문명과 조선 유학의 접점에서 ‘기학’이란 말을 사용했다. 단순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기를 ‘기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氣學, 예술과 인간 몸의 담론과 실천이라는 두 분야

물론 氣學의 연구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을 다 해명해 줄 수 있듯이 말하는 것 또한 착각이다. 전통 학문에서 氣는 주로 우주론과 인간학이라는 두 가지 층차를 갖는 것이었다. 이미 서구화된 문명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에게 氣를 통해 우주의 구조나 생명의 유래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서구로부터 배운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연구를 부정하고 다시 전통적인 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학이라는 측면, 인간의 삶의 환경을 이해하고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분야에서는 이와 다르다.

이미 출간된 ‘기학의 모험’ 1권과 2권이 보여주듯이, 氣學이 관련되는 영역은 철학 이외에도 회화, 서예, 음악, 문학, 음식, 심리학, 침과 약으로 대변되는 한의학 등이 있는데, 모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기학의 전통이다. 달리 말하자면, 기학이 아직도 유의미한 기능을 하고 있는 영역은 주로 예술과 인간의 몸과 관련된 담론과 실천이라는 이야기다. 經絡을 실증적으로 규명하려는 일부 학자들의 노력이나, 우리 사회의 의료 기관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의학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氣學은 살아 있는 담론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氣는 어디로

최근 氣學이라 말할 수 있는 학계의 연구 분야는 다양하다. 氣를 임상적으로 실증하려는 과학계의 노력 이외에도 의사소통 이론, 심리학, 음악을 통한 정신 치료 등과 같은 분야에서는 氣를 중요한 학문적 개념으로 이용하려는 학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또한 생물학이나 의학 분야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기 개념을 도입하여 기존의 연구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대체 과학이라는 한정된 틀에서의 연구이긴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기 과학(Ki science)이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 학계에만 한정되어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양하게 일어나는 시도이다. 무엇보다 기학과 관련된 다양한 학문적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기와 관련된 전통 담론의 허와 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논의와 사이비 담론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곧 기학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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