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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서평 :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 발전연구』(원유한 지음, 혜안 刊, 2003, 438쪽)
본격서평 :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 발전연구』(원유한 지음, 혜안 刊, 2003, 438쪽)
  • 신병주 규장각
  • 승인 2004.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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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화폐정책 분석 돋보여…실학으로의 일반화는 무리

신병주 / 규장각 책임연구원 한국사

최근 실학의 실체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김용옥은 ‘실학’이 당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점과 조선후기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자였음을 강조하고 실학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며 기존의 학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이수광, 유형원, 이익처럼 성리학의 이론화와 예학화 경향을 비판하면서 실천과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학자들이 분명 나타났나는 점을 고려하면―물론 이들도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자지만― 실학이라는 용어 자체를 당시에 확립된 용어가 아니라 해 파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학이라는 개념이 사라진다면 조선 중?후기 이후 일부 지식인에 의해 추구됐던 역동적인 사회개혁 의지들이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될 위험성이 있다.

실학자에서 역사상황으로 연구초점 확대

원유한 전 동국대 교수의 저서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 발전 연구’는 ‘실학’이라는 개념 자체는 수용하면서도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실학’의 생성, 발전 과정을 연구한 논저이다. 저자는 실학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실학 이해의 시각을 실학자 중심에서 역사적 상황 중심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후,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과 발전, 실학의 개화사상으로의 전승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2장의 실학의 생성 부분에서는 조선초기부터 開城에서 생성된 조선후기의 실학지향적 사회사조가 조선후기 실학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살펴봤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학이 지니는 개방성과 상업 중시 흐름을 실학의 주요한 배경으로 설정한 점은, 이제까지 서경덕의 사상을 주기철학 중심으로만 파악한 데서 한 단계 진일보한 것으로 조선중기 비주류 사상가들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경학을 지나치게 강조해 ‘유형원이 局地的 성격이 짙은 개경학을 전수하여 조선후기 실학으로 그 학문적 체계를 이룬다’라고 한 점은 지나친 비약으로 여겨진다. 유형원과 화담학파의 인적, 학문적 계승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몇 가지 지표만을 놓고 유형원에 대해 개경학을 전수하여 실학을 체계화한 인물로 몰고 가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3장에서는 개경학이 전승되어 조선후기 실학으로 학문적 체계를 이룬 이후 실학의 발전을 살펴보았다.

화폐정책론과 실학의 연관성 규명

저자는 실학자들의 화폐정책론을 중심으로, 실학의 발전과정과 근대지향적인 흐름 등을 규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저자가 기존의 논문에서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온 분야로 조선후기 화폐정책론과 실학의 연관성을 밝혔다는 점에서 실학 연구의 분야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4장은 실학의 개화사상으로의 전승이라는 제목 하에 초기 개화사상가인 유길준의 화폐정책론의 발전 과정을 통해 실학과 개화사상의 연관관계를 다루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제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개경학이 실학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점을 밝히고, 화폐정책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실학의 형성과 그 발전 가능성을 논증한 점에서 실학 연구의 범위를 보다 확대한 논저로 평가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경학이나 화폐정책만을 주요 주제로 다루면서 책의 제목을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 발전연구’라고 한 것은 자칫 실학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와 방향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개경학이나 화폐정책은 모두 조선중후기 이후 나타나는 상업적 흐름의 한 경향으로서 이것이 조선후기 사회를 보다 역동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지표임에는 분명하지만 ‘실학’이라는 큰 개념으로 정착시키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것으로 판단된다. 차라리 제목을 ‘조선후기의 상업적 흐름과 화폐정책’ 정도로 하는 것이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부합하지 않을까.

관료학자들을 좀더 부각시켰더라면

또한 이 책에서는 김신국, 이덕형, 김육, 허적 등 고급관료들의 화폐정책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이들의 화폐 가치 인식은 본질적으로 유형원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위치―실학자인지 관료학자인지―에 대해서는 개념 규정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제목으로만 보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한 이들 관료들도 실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할 듯하다. 이러한 문제점 역시 책의 제목을 ‘조선후기 실학의 생성?발전연구’라 한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실학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조선 중, 후기 상업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화폐유통에 적극적이었던 김신국, 김육, 허적 등의 관료학자들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책은 개경학과 화폐정책을 지나치게 실학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키려 함으로써 무리한 해석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존에서 소외됐던 개경학이나 화폐정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것이 지니는 실학과의 연관성 및 개화사상과의 계승문제 등을 다룸으로써  실학의 개념과 분야를 보다 확산시켰다는 점에서는 주목될만한 저술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조선중기 처사형 사림의 학풍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록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왕조실록의 관리체계’,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이,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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