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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
‘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
  • 이충진
  • 승인 2021.05.04 14:0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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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진 한성대 교수 기고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인문교양학부)가 지난 2019년 12월 철학연구회의 학회지 <철학연구 127호>를 통해 발표한 논문 「’관음충’의 발생학」에 대해 뒤늦은 후폭풍이 거세다. 지난 2월 명예훼손 공방으로 시작된 논란은 당사자와 미디어의 말을 타고 젠더 갈등을 넘어 논문 형식의 부실함과 내용의 혐오적 성격에 대한 문제제기, 학회의 대응 비판 등으로 번졌고, 윤지선 씨를 겨냥한 불특정 세력의 ‘온라인 강의 난동’도 벌어졌다. 논문 바깥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논문 속 내용에 대한 논의마저 뒤덮고 있는 상황이다. <교수신문>은 해당 논문의 논증 방식을 철학적으로 검토하고 철학연구회의 대처를 논평한 이충진 한성대 교수(교양학부)의 기고글을 싣는다. 반론의 창구는 열려 있다. 보다 냉철한 공론의 장이 바로서기를 바란다.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의 논문이 실렸던 '철학연구' 2019년 겨울호.

 

철학연구회는 지난 2월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철학연구회가 2019년 12월 발간한 학회지에 윤지선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유튜버 ‘보겸’이 그 논문으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두 번의 대책회의 후 철학연구회는 윤지선의 동의를 얻어 해당 표현을 수정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나의 각주에 주목했던 보겸과 달리 일반 대중은 윤지선의 논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철학연구회에 논문 철회를 요구했고 이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오르기까지 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철학연구회와 철학계는 거센 항의와 비난과 조롱에 직면해 있다. 몇몇 유튜버,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언론인, 전문 학자 등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철학연구회가 수정한 각주는 다음과 같다.

수정 전

보겸이라는 유튜버에 의해 전파된 ‘보이루’라는 용어는 ‘보지+하이루’의 합성어로, 초등학교 남학생부터 20-30대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용어 놀이의 유행어처럼 사용되었다.

수정 후

이 용어는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 BJ 보겸이 ‘보겸+하이루’를 합성하여 인사말처럼 사용하며 시작되다가, 초등학생을 비롯하여 젊은 2,30대 남성에 이르기까지 여성 성기를 비하하는 표현인 ‘보지+하이루’로 유행어처럼 사용, 전파된 표현이다.

 

아마도 철학연구회는 ‘사실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도록’ 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또 ‘수정 후’는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당사자 보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명제(① ‘보이루’는 보겸이 만들었다. 그리고/그런데 ② ‘보이루’는 여성혐오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로부터 세 번째 명제(그러므로 ③ 보겸은 여성혐오용어를 만들었다)로 진행하는 것이 사유의 자연스러운 진행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경험적 의미 이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더욱이 본문은 ‘보이루’를 여성혐오용어로 확정하고 있지 않은가?

3인의 심사위원이 명예훼손의 가능성을 미리 감지했더라면, 혹은 철학연구회의 대책회의가 해당 표현을 모두 삭제하는 조치를 취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 유감스러운 일이다. 현재 철학연구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보겸에 대한 공개적 사과뿐일 듯하다. 법적 판단이나 사회적 논쟁 그리고 윤지선의 개인적 사과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전제가 아니라 입증이 필요했다

 

논문의 제목은 이렇다: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 이 논문이 다루고 있는 세 개의 주제 중 첫 번째 것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태어난 남아가 어떻게 ‘관음충’으로 집단적으로 생장, 진화하는가를 분석하고자,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자기복제 기제들을 들여다[본다].” 관련 논의는 ‘2.2. 관음충 개체들의 자가복제 기제 분석’이란 제목 아래 제시되었는데, 그것의 형식적 구조는 아래와 같다.

p -> q이다. 그런데 p이다. 그러므로 q이다.

p: 한국남아는 특정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놓여 있다.

q: 한국남아는 특정한 한국성인남자로 성장한다.

* ‘특정한’은 대략 ‘관음증을 유발, 발생, 확장하는’을 의미한다. 나는 ‘성차별적’이란 표현을 사용하겠다.

 

'관음충의 발생학' 논문 첫 페이지

 

이 논의가 형식적 합리성(타당성)만이 아니라 실질적 합리성(건전성)을 가지려면 우선 소전제(p)가 참이어야 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윤지선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을 제시-분석한다. 그리고 바로 이 논의에 대하여 3인의 심사자는 ‘설득력 있다’라고 평가한 셈이다.

심사자의 평가가 틀렸을까? 그에 대해선 누구도 확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해당 논의는 귀납논증이기 때문이다. 귀납논증의 합리성은 1%에서 99% 사이이며 이를 논리학자들은 ‘약한 또는 강한’이란 말로 표현한다. 즉 귀납논증은 상대적 설득력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윤지선의 견해(p)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 어느 정도의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는지, 기존에 제시된 근거들이 충분한지, 그 점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소전제(p)가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논증의 건전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대전제(p->q)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전제를 일상어로 표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만일 한국남아가 성차별적 환경에 놓여 있다면 한국남아는 성차별적 한국성인남자로 성장한다.

 

이 명제는 직관적으로 확실하다. 즉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 같다. 또 일반인이든 전문 학자이든 전건(p)과 후건(q)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도 않다. 비유하자면 近墨者黑 近朱者赤(근묵자흑 근주자적. 먹을 가까이하는 자는 검게 되고 인주를 가까이하는 자는 붉게 된다)이란 말에서 필연성을 찾는 사람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직관적 확실성이 문제를 일으킨다.

위 명제의 ‘한국남아’를 ‘미국남아’, ‘중국남아’ ‘한국여아’ 등으로, 또 ‘한국성인남자’를 같은 방식으로 대체해보자. 이렇게 해도 전건과 후건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아무 변화가 없음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다음의 명제를 갖게 된다.

만일 어린아이가 성차별적 환경에 놓여 있다면 그 어린아이는 성차별적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 명제 역시 직관적으로 확실하다. 하지만 이번엔 직관적 확실성이 윤지선의 대전제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명제는 ‘성차별적 성인으로의 성장’이 한국어린아이에게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어린아이에게 해당되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일 윤지선의 논문이 “한국남성성[의] 분석”(제목)이 될 수 있으려면 ‘성차별적 성인으로의 성장’이 한국의 특수성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한 한국적 특수성은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어야 할 사안이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회와의 비교 연구뿐이다. 하지만 윤지선의 논문엔 그러한 비교 연구가 없다. 그것의 필요성을 알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충(蟲)’, 혐오 표현 동원된 ‘혐오의 논의’

 

이제 우리는 위 명제의 내용을 조금 변경해서 다음의 명제를 만들어보자.

만일 인간이 특정한 환경에 놓여 있다면 그 인간은 그 특정한 모습의 인간으로 변화한다.

 

이 명제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친숙한 것을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여러 형태로, 가령 자유 의지와 결정론, 진화론, 물리주의 등의 형태로 논의해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 중이다. 철학자는 이 주제를 철학적인 방식으로 논의하는데, 가령 ‘전건과 후건 사이의 논리적 연관관계를 어떤 근거로,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고 묻고 그 대답을 찾고자 시도한다. 그것이 무전제성에의 요구에 걸맞은 연구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윤지선은 일반적인-전통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즉 대전제를 전제로 사용하기만 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러한 특이한 논의 방식은 아마도 논의 전체의 지향점 때문인 듯이 보인다. 이 점은 위 명제를 윤지선의 언어로 표현하면 분명해진다.

만일 한국남아가 성차별적 환경에 놓여 있다면 한국남아는 한남유충-한남성충-관음충으로 성장한다.

 

논의의 지향점은 논의 과정을 함축한다. 윤지선의 논의 과정은 전건에서 후건으로 이행하는 (논리적이 아니라) 사실적인 과정을 추적-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의 탐구를 그는 ‘발생학’이라고 부른다. 이 발생학적 논의에서 ‘한남유충’, ‘한남성충’, ‘관음충’ 등의 용어가 무차별적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듯이 ‘한남유충’, ‘한남성충’, ‘관음충’ 등의 용어를 각각 ‘성차별적 한국남아’ ‘성차별적 한국성인남자’, ‘관음중독자’ 등으로 대체해도 아무런 문제가 야기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하면 ‘~충’이란 용어 사용은 논의 전개의 합리성이나 논문의 학문적 가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윤지선이 ‘~충’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전체 논의의 지향점 때문일 것이며, 그 지향점은 논문의 외부에 놓여 있는, 즉 비학문적-사회적 지향점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윤지선의 대전제를 약간 변경해서 몇 개의 명제를 만들어보자. 논리적 엄밀성은 잠시 잊기로 하자.

A: 흑인남아는 빈곤한 환경에서 자란다.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은 범죄자가 된다. 그러므로 흑인남아는 범죄자로 성장한다.

B: 유대인 어린아이는 비-유럽적 문화 환경에서 산다. 비-유럽적 문화 환경에서 사는 어린아이는 열등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므로 유대인 어린아이는 열등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 논증을 입증하기 위한 경험적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논리학자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결론을 지지하는 전제들이 참임을 우리는 경험적 근거들을 통해서(즉, 귀납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비록 저 논증들이 설득력이 갖추었다고 해도 저런 결론을 가진 논문은 학술지에 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200년 전 미국이나 100년 전 독일이면 몰라도 ‘지금 여기’의 학술지에는 결코 등장할 수 없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공적 언론에도 발표될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사회는 명시적-비명시적 금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금기를 넘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학문적으로도 금지되기 때문이다.

윤지선의 논문은 이 부분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 그것을 이해해야 할 의무는 누구도 갖지 않는다 – 그의 용어 사용과 그의 전제 선택과 그의 논의 과정 및 결론은 ‘지금 여기’ 사회의 금기를 한참 벗어난다. ‘한남유충’ ‘한남충’ ‘관음충인 한국남자’ 등은 ‘지금 여기’에서는 분명 혐오의 표현이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논의는 혐오의 논의이다.

 

격화되는 논란 속 길어지는 학회의 침묵

 

그러한 용어의 사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윤지선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남유충, 한남성충, 관음충 용어들의 다각적 방사효과’라는 이름의 긴 논의에서 “[이 용어들은] 대한민국 남성에 대한 혐오용어로서 금기시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논문이 학회의 심사에서 통과되었으므로 윤지선은 당연히 ‘아니다’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또 그런 용어를 사용하여 작성된 자신의 논문이 학술논문의 자격을 획득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지선과 달리 또 3인의 심사위원들과는 달리 ‘지금 여기’의 많은 사람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윤지선의 논문은 혐오 논문이며 학술지에 발표되어서는 안 되는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추측하건대 철학연구회는 논문심사 과정과 대책회의에서 혐오 표현이란 문제에 주목하지 않은 듯하다. 아니면 주목했어도 윤지선의 논문이 혐오 논문에 해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혐오 논문임에도 학술지에 발표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나로서는 아쉽고 이해하기 어렵다.

혐오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연구자에 의한] 위조·변조 여부[의] 조사” 및 “[논문심사의] 절차적 과정에서 부정이나 결함의 확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특히 대책회의가 반드시 주목했어야 했었던 문제이며 철학계 외부를 향해 발표되는 ‘입장문’에서 가장 명확하게 명기되었어야 했었던 부분이다. 지난 두 달 동안의 침묵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지, 그래도 괜찮을지 철학연구회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듯하다.

만일 학술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나는 윤지선의 글을 매우 반겼을 것이다. 현실 사회에 굳건히 발을 딛고 다른 이론가에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것은 과거 텍스트의 정확한 해석에 집중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너무도 부러운 일이다. 학자로서 또 개인으로서 그의 시선과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다.

사실 철학계를 향한 비난과 조롱보다 내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 것은 어느 젊은 철학도의 자괴감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스승들을 보며 미래를 꿈 꿨지만 그에겐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평생 철학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없이 미안하기만 하다.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이충진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행복 철학』(2020),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2015), 『이성과 권리』(2000) 등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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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2021-05-08 11:28:55
밑에 말 같잖은 댓글이 추천 박히는 꼴이 어이가 없어서 댓글을 씁니다.
’충(蟲)’, 혐오 표현 동원된 ‘혐오의 논의’에 나온 예시 두 개는 그 예시의 지향점이 '흑인은 범죄자로 성장한다', '유대인은 열등한 성인으로 성장한다'이고 이는 윤지선 논문의 '한국남아는 관음충으로 성장한다'와 같이 혐오의 논의라서 가져온 것입니다.
김현수씨가 적은 예시도 그 지향점이 '남아공 백인은 인종차별주의자로 성장한다'이니 혐오의 논의로 똑같은 예시인데 이걸 좋다고 추천하는 꼴을 보니 웃음만 나네요.
'한국 남아는 여성혐오자로 성장한다'는 문장은 어떠냐?는 말을 돌려한 건데, 이도 마찬가집니다.
이 정도 텍스트 이해를 못하니 윤지선 논문을 커버칠 수 있나 싶네요.

김현수 2021-05-07 11:49:46
위에서 제시하신 흑인남아와 유대인 어린아이의 예시보다는, 이것은 어떨까요?
C: 남아공 백인 아이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속에서 자란다. 아파르트헤이트 속에서 자란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 그러므로 남아공 백인 아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로 성장한다.

벼리 2021-05-05 07:55:39
진정성 담긴 비판글 너무 감사드리며, 교수님의 용기에 존경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