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1:00 (금)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4.11.22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본 함석헌-50

함 선생님의 사모님이 영면하시던 1978년 5월 8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학원민주선언문'을 발표했다. 유신헌법 철폐, 구속자 석방, 학생회 부활, 처벌학생 복귀, 노동3권 보장, 자유언론 등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행동지침까지 선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6월 12일 서울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는 7월 6일 상오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회식을 갖고 박정희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제2대 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 박정희 후보가 2,577표(무효1표)를 얻어(99.9%) 임기 6년의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웃지 못할 기괴망측한 방식으로 선출된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날짜가 12월 27일이었으니 1978년은 이렇게 역사의 피안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부는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해제하였으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하고 1천3백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을 베풀었다.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사실상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던 김대중 씨도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김대중은 자택 연금을 당했고 그에 대한 언론보도는 일체 금지당했다. 50 내지 1백여명의 사복 경찰이 동교동 자택 주위를 에워싸고 24시간 감시에 들어갔다.

<열사람 다섯사람 혹은 한사람/ 의인이 있음으로/ 더디하시는 성의 멸망// 열사람 다섯사람 혹은 한사람/ 악인이 있음으로 더하는/ 만, 백만, 천만 혹은/ 오천만의 시달림과 공고,// 아픔과 분노, 참음과 연민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빛속의 어둠,/ 칠흑속의 소리울음이여,…>

1979년 신년호 '씨 의 소리'지는 故 朴斗鎭 詩人의 시로 시작된다. 당시 수많은 사건들의 울부짖음을 위의 '봄 아침 빛'이라는 시의 첫 부분으로 대신하고 1979년 5월 8일 함 선생님 사모님 일주기 추도예배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사모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일정한 장소를 택하여 성대하게 치르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함 선생님께서 극구 사양하셔서 외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조촐하게 가족을 중심으로 친지 몇 분이 원효로 4가 선생님 댁에서 모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50여명의 손님들이 쇄도하여 좁은 선생님 댁 마루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태평교회의 이두수 목사님의 사회로 이문영 교수의 기도, 문동환 목사의 설교, 김동길 박사의 추도사 그리고 통일의 노래 제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문영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완성하셨듯이 함 선생님 사모님의 죽으심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찾고 우리 후손들의 오늘의 뜻을 완성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드렸다. 문동환 목사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에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이 땅에서 고생하는 무리들이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고생스럽게 억울하게 살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계속해서 꿈꾸고 바라던 그런 사람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그들이 바라던 그것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성경 말씀을 해석하면서 사모님은 이 땅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나사로 같이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또한 이 민중의 역사 안에서 함 선생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라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다. 김동길 박사는 사모님은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간을 병고에만 시달리셨는데 언제 보아도 선하시고 남에게 해로운 일이라고는 조금도 안 하신 분이 그렇게 고생스럽게 아픔을 참으시며 마지막을 보내셨는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착한 사람에게 이렇게 고생을 시키시고 못된 사람이 활개를 치게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하나님이 고생하는 부분을 사모님이 담당하게 하신 것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며 또 사모님이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남기신 뜻은 그 분이 우리 한국의 함석헌 선생님을 한평생 모시고 그분만을 받들고 살아온 이 나라의 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분의 삶이 우리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는 내용의 추도사를 마쳤다.

나는 작년 사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국내에 없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선생님 댁을 찾았다. 김 박사가 추도사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와 좌정할 무렵 갑자기 조용한 분위기가 다소 흔들리는 듯 하더니 김대중 씨가 온다는 전언이 돌았다. 신문에서 그리고 말로만 듣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직접 가까운 데서 만나게 되었다는 설레임 같은 느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배 드리는 동안 내내 마루의 창문 옆에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계셨던 함 선생님 앞에 김대중 씨가 드디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왼손에는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고 바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좌우로 세 명씩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마루 위에 겸허하게 서 계신 80노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김대중 씨 모습에서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던 병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뻘인 늙으신 선생님 앞에서 지팡이를 딱 짚고 서 있는 그 태도에서 나는 도무지 추도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잠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옆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동길 박사가 나의 어깨를 흔들면서 나가는 것이 어떻냐라는 눈짓을 전해왔으므로 함께 일어서서 앞에 무릎꿇고 앉아 계신 몇몇분을 헤치면서 그 장소를 떠났는데 나오면서 정면에 서 있는 김대중 씨와 악수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김대중씨를 직접 대할 수 있었던 단 한번의 만남이었다. 김 박사의 자동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면서 그때까지 몇 번 김대중 씨와의 만남을 피해왔던 것이 그렇게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옛날에 아마도 지금 김홍일 의원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남편 김대중 후보가 선거에 패하고 피신 중에 빚 독촉에 못이겨 자살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타인지사이기는 하지만 다소 분노 같은 느낌을 가졌었던 기억이 되살아 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80년 봉원교회에서 강연하는 모습 ©
<예수님 말씀하신 것 옳은 말씀 아니에요? "너희가 이제 있다가는 어디로 끌려갈런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소위 재판한다, 정치한다는 사람 앞에 가 설지도 모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대답을 어떻게 할까, 그건 걱정하지 말라. 그 순간에 가면 말할 것을 주실거다. 왜?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요 네 속에 있는 그 분이 하시는 거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그랬어요. 이 말씀을 이 순간에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순간밖에는 다른 순간은 생각지도 마시고, 여기 모인 사람밖에 다른 사람들 생각하실 것 없고 지금 이 순간의 예배밖에 또 다른 무슨 생각을… 이전에 했고 이 앞으로도 할거고,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도록 노력을 하셔야 할겁니다….
박정희 씨라는 이가 지난해 10월 26일에 그렇게 될 순간까지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그 요새를 다 지은 다음에 자기 생각했던 것을 계획대로 다 하자고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안됐습니다. 몰랐습니다.
근 20년 가까운 세월을 이 나라를 마음대로 한 사람이었지만 꼼짝할 수도 없었고 그 닥쳐오는 순간을 자기 힘으로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느 무슨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 말은 잘 알거니까 누구의 일보다도 두드러져서 실례를 들기에 좋으니까 지금 하는 말입니다.
그럼 그 하나를 봤으면 사람이 이 시간 말고 이 곳 말고 이 사람 말고 이 일 말고 또 무엇이 있거니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잘 알거예요. 다른 이에게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게는 지난해 10월 26일에 생긴 일은 사람의 생각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일이라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생긴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마 그러실 줄 압니다.>('씨 의 소리'지 통권 96호: 24∼25)

함 선생님께서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은 위에서 인용한 말씀밖에는 다른 데서 보거나 들은 바 없다. 위의 말씀은 1980년 8일 17일 주일 내가 나가는 봉원교회에서 하신 말씀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때 설교 제목은 '절대승리'였다. 이렇게 79년에서 80년 봄까지 계속되는 '서울의 봄'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정현필 2004-12-04 04:59:52
42,44,46,47,48,49회를 읽을수가 없는데 이부분도 읽을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