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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게 연구하는 삶
조금 늦게 연구하는 삶
  • 유병수
  • 승인 2021.06.02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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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유병수 미 텍사스A&M대 수학과 박사 후보

정년 보장 전까지 떠도는 박사과정의 삶
‘보통’ 주기 벗어나는 것 두려워 말아야

 

미국 석박사과정에 들어선 것은 생후 29년 11개월, 만 서른 살 생일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동기들은 대부분 20대 초반. 마음만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연구 안에서 끝없는 실패 뒤에 찾아오는 작은 성공의 기쁨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개인정보를 묻지 않는 미국 수학계의 풍토 역시 나이를 잊고 살게 했다. 그렇지만 하루를 온종일 일로 채울 수는 없는 법이다. 

저년차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체력이었다. 자격시험(Qualifying exam)은 꽤 많은 양의 문제 풀이를 요구했다. 나 역시 다른 친구들과 같이 온종일을 투자해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씩씩한 동기들과 달리 나는 점점 초췌해졌다. 가끔 안 풀리는 문제를 두고 토론이라도 하다가 밤을 새워버리면 다음 날은 자체 공강을 실시했다. 피크닉에서 세 시간 동안 내리 축구, 프리스비, 그리고 배구를 한 뒤 당일 자정에 숙제를 제출하는 동기들과 달리 나에게는 온전한 휴식이 필요했다. 나이가 주는 제약은 바로 휴식의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

직업으로서의 박사과정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노동법의 적용이 배제된 특수한 형태의 직종이다. 미국에서 한때 블랙 유머로 돌았던 ‘큰 페퍼로니 피자와 수학 박사의 차이점(최소한 전자는 4인 가족의 끼니를 해결한다)’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해 있다. 하지만 적어도 큰 페퍼로니 피자와 박사과정생을 비교한다면 사실일 것이다.

부족한 봉급은 나뿐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옥죄었으나 생애주기는 특별히 나에게 경조사를 더 얹어주었다.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하는 친구들의 결혼과 출산 역시 다른 친구들만큼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다. 무엇보다 자식 없이 회갑연을 치른 부모님께는 지금도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그래도 경사는 나은 편이다. 친구가 어려운 일을 겪어도 옆에 있어 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있는 가족도 잘 못 챙기는데 내 가족을 꾸려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졸업 후에도 연구자 진로를 희망한다면 나와 가족이 될 사람은 부평초 같고 잉여소득이 없는 삶을 테뉴어를 받기 전까지 10년 정도 같이 견뎌야 한다. 저년차에는 박사과정 자체를 잘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4년차인 지금은 끝낼 순 있어 보이지만 어떤 직장을 잡게 될지 확신을 하기 힘들다.

설령 포닥을 잡는다고 해도 경제 사정이 바로 좋아지진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불안정한 삶을 같이할 사람을 지금 있는 도시에서 찾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내가 사는 곳이 소도시라 힘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대학이 소도시에 있는 미국에선 앞으로도 마주칠 상황일 것이다. 테뉴어를 받아도 피할 수 없는 두 사람 문제(Two body problem)를 시작할 필요조차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직장과 가족의 불확실성은 삶 전체에 대한 재무 설계를 방해한다. 서른 중반이 되니 슬슬 미국의 또래 친구들이 넣는 은퇴 계획용 연금 계좌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나의 신분에서는 계좌 개설이 불가능하다. 설령 박사 후 과정에서 계좌를 개설한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을 만큼 큰 금액을 모으기도 힘들거니와 혹시라도 미국 밖을 떠날 가능성이 있기에 좋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물론 내 전공은 STEM의 한 글자를 차지하는 전공인 만큼 포닥 자리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은 있다. 그러나 멀게만 느껴지는 기대감보단 자산시장 부양의 혜택을 받아 주식으로 큰돈을 번 친구들이 더 가까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위와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박사를 시작한 것 자체는 굉장히 잘한 선택이라 생각하고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을 피하려는 자기방어 기제인지는 몰라도, 만약 내가 연구가 주는 행복감을 맛보지 못했다면 평생 후회했을 거라 느껴진다. 하지만 일상이 주는 행복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연구 말고도 해야 할 것이 많다.

혹 나와 같은 늦깎이 박사생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평소에 체력을 단련하고, 자신의 삶을 재무적으로 더 잘 준비하고, 생애주기를 이탈하는 것에 두려움(Fear of missing out)을 갖지 않은 채, 일에 집중하는 것만큼이나 가족들과 친구들을 충분히 챙길 수 있다면 좋겠다. 모든 박사생의 건투를 빈다.

 

유병수

미국 텍사스 A&M 대 수학과 박사 후보다. 대수적 특징들을 조합론을 이용해 대수적 특징을 도출하는 조합론적 가환대수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 「통계학적 관점에서 본 집단적 유해물질 사건에서의 인과관계 법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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