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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바우하우스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일본은 바우하우스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오창섭
  • 승인 2021.06.10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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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⑤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바실리 의자(Wassily Chair) 사진= Cooper Hewitt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바실리 의자(Wassily Chair) 사진= Cooper Hewitt

코로나 19로 변해가는 게 많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외로움을 달랜다. 뉴스 확인이나 영화 관람은 물론이고, 쇼핑도 스마트폰으로 즐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근마켓’같은 동네 기반의 중고품 거래 플랫폼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중고품 거래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근마켓의 주간 사용자는 이미 1,000만을 넘어섰고, 수백만 원이 넘는 물품이 거래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얼마 전 그곳에서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가 250만 원에 거래되는 것을 보았다. 바우하우스에서 배우고 가르쳤던 마르셀 브로이어가 근대적 재료인 철과 튼튼하게 직조된 천을 이용해 디자인한 이 의자는 바우하우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마도 바우하우스에서 추구했던 조형과 정신을 잘 보여주는 제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실리 체어는 지금까지도 제작 판매되고 있다. 물론 진품은 비싸다. 그래서인지 고급 매장의 소품으로, 혹은 부자들의 취향 과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술 민주화의 정신으로 등장한 근대 디자인의 산물들이 그러한 모습으로 소비되고 유통되는 현실은 어딘지 모르게 기묘하고, 그래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근대 디자인을, 그리고 바우하우스를 수용하는 하나의 모습임을 부정할 수 없다. 수용이란 어쩌면 그렇게 가감(加減)을 동반하는 움직임인지 모른다.

얼마 전 디자인역사 관련 학회가 열렸다. 물론 온라인 형식이었다. 오프라인으로 열렸다면 참가를 고민할 수도 있었겠지만, 클릭만으로 참여할 수 있었기에 나는 특별한 고민 없이 학회에 접속했다. 그날 모든 발표 내용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일본이 바우하우스를 수용하는 과정에 대해 다룬 발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수용’이라는 말에서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단순한 이전의 움직임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이념이나 지향점과는 다른, 가감의 움직임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무엇인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세워진 디자인학교다. 디자인학교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디자인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는 미술, 무대, 공예, 사진, 그래픽, 건축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졌다. 바우하우스는 근대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기계 미학과 인공물의 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이상 때문일 것이다.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조형은 합리성에 기초한 기능적이고 기하학적이며 순수한 형태였다. 그것은 계급의 표식이라 할 수 있는 장식을 배제한 것으로, 일상용품이나 이미지의 디자인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우하우스는 예술 민주화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와 친화성을 가진 움직임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나치에 의해 폐교되었다.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은 것은 아방가르드들의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과의 친화성에도 원인이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지향점, 다시 말해 근대적 아방가르드들의 지향점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독일 사회로 파고들고 있던 당시 나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이었을까? 한국인으로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이는 없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이미 1920년대에 바우하우스로 유학을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미즈타니 타케히코(水谷武彦)가 대표적인데, 그는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1927년 바우하우스로 유학 갔다. 귀국 후에는 사생(寫生)과 임화(臨畫) 중심이었던 동경미술학교 교육을 구성 중심의 교육으로 변화시키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학회 발표에서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은 야마와키 이와오(山脇巖)라는 부잣집 사위였다. 그 역시 미즈타니 타케히코보다 늦은 1930년에 바우하우스로 유학을 떠났고, 바우하우스가 문을 닫을 무렵에 귀국했다. 떠나기 전에 이미 건축일을 했었기 때문에 바우하우스 기초교육에 관심을 가졌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호이너지의 사진 작업과 포토몽타주에 관심을 가졌다. 흥미로운 것은 귀국 후 그가 한 일이다. 

당시 군국주의 일본은 대륙진출의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야마와키 이와오가 유학 중이던 1931년에 이미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3년에는 침략에 대한 국제사회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그리고 1939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는 그러한 상황에서 열렸다. 일본은 전쟁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뉴욕 만국박람회를 통해 씻어내고자 했고, 야마와키 이와오는 그러한 의도를 자신이 바우하우스에서 배우고 접한 사진 기법으로 실현했다. 뉴욕 만국박람회 국제관의 일본부 전시공간에서 그가 보여준 포토몽타주를 활용한 커다란 사진 작업은 폭력의 주체였던 일본의 폭력성을 문화의 외관으로 위장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러한 야마와키 이와오의 움직임이 바우하우스의 수용이라면 이 또한 기묘한 수용이 아닐 수 없다.

오창섭
디자인연구자로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수상했으며,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안녕, 낯선 사람> 전시(2017)와 DDP디자인뮤지엄의 <행복의 기호들> 전시(2020)를 기획했다. 저서로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근대의 역습』,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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