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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진리’란 연합체를 회집하는 것”
“정치적 ‘진리’란 연합체를 회집하는 것”
  • 김효진
  • 승인 2021.06.11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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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브뤼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432쪽

합리주의 기반의 진리 정치는 세계를 탈정치화
울리히 벡과 지젝, 정치적 해결책 모색 못해
 

‘기후위기’ 시대로 규정되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브뤼노 라투르는 비인간 행위자가 세상만사에 기여하는 역할을 부각함으로써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근대성을 해체하고 대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회과학적 연구방법론으로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확립한 라투르는 대개 사회과학자로 분류되고, 사실상 그의 작업의 철학적 기반과 함의는 본격적으로 고찰되지 않았다. 특히, 라투르가 과학기술 생산 과정을 하나의 정치적 과정으로 단언한 사실을 참작하면, 그의 작업이 내포하는 정치 이론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기이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중심적인 근대적 철학의 경향에 대항하여 객체지향 존재론을 제시한 그레이엄 하먼이 라투르의 정치철학을 해설한 책을 읽게 되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다. 이전에 하먼은 라투르를 현대의 증추적인 철학자로서 고찰한 『네트워크의 군주』라는 책을 저술한 바가 있다.

이 책의 서론에서 하먼은, 자연과 사회라는 근대적 이항 구조에 기반을 두고서, 전통적인 좌익 정치-우익 정치의 수평축에 진리(하익) 정치-권력(상익) 정치의 수직축을 덧붙임으로써 근대적 정치 이론을 분석할 네겹 구조의 틀을 마련한다. 진리 정치는 정치가 “진리의 형상대로 구축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권력 정치는 정치가 진리 기준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지젝과 바디우는 좌익 형태의 진리 정치를 대표하고 플라톤과 슈트라우스는 우익 형태의 진리 정치를 대변한다. 좌익 형태의 권력 정치는 포스트모던 지식인들의 정체성 정치에서 실현되고 우익 형태의 권력 정치의 대표적 인물은 홉스와 슈미트다. 라투르의 비근대주의적 정치 이론은 이런 네겹 구조에 따라 명료하게 분류될 수는 없지만, 굳이 규정한다면 홉스/슈미트의 우익 권력 정치 사분면에 속할 것이라고 하먼은 추정한다. 하먼에 따르면, 라투르의 정치철학은 정치적 권역에 비인간 행위자들을 추가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홉스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라투르가 질색하는 정치는 합리주의를 먹고 사는 진리 정치임이 명백한데, 그 이유는 합리주의적 모형은 정치를 계몽적 교육으로 대체함으로써 세계를 탈정치화하고 정치적 해결책을 전혀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울리히 벡의 세계시민주의를 격렬히 비판하고 지젝 역시 정치에 실패할 따름이라고 단언한다.

정치 이론 분석할 네겹 구조의 틀

이 책에서 하먼은, 지금까지 진전된 라투르의 전체적인 지적 활동은 철저한 내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홉스주의적 틀의 결점을 직시함으로써 그 자신을 홉스의 영향력에서 해방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이런 구상에 의거하여, 하먼은 라투르의 정치철학적 단계를 초기, 중기, 후기 라투르로 나누어 고찰한다. ‘초기 라투르’는 행위자들의 ‘힘겨루기’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홉스주의적 권력 정치를 옹호하고, ‘중기 라투르’에게 정치는 기존의 정치적 집합체의 외부에 있는 인간들과 비인간들―하먼은 “미니-초월성”이라고 일컫는다―을 포섭하여 하나의 공동세계를 조성하는 것, 즉 ‘코스모폴리틱스’가 된다. ‘후기 라투르’는 정치를 다수의 ‘존재양식’ 중 하나의 존재양식으로 구상함으로써 이제 정치는 여타 양식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적실성 조건을 갖추게 된다. 여기서 라투르는 실용주의적 전통에 의지함으로써 근대주의적 네겹 구조의 정치철학적 틀을 ‘객체지향 정치철학’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쟁점, 객체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정치적 ‘진리’란 “집합체를 확대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된다. 라투르에 따르면, 정치적 쟁점은 쟁점 구성의 정치적-1단계에서 행정적 관리 대상이 되는 정치적-5단계까지 이르는 수명주기를 겪기에 새로운 쟁점은 새로운 공중의 회집을 요구하게 된다. 라투르가 가장 경계하는 점은, 우리가 “자신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필요한 일”, 즉 행위자들의 연합체를 회집하는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원칙의 이름으로 젠체하는 것”이다.

요컨대, 라투르 정치 이론의 근저에 놓여 있는 두 가지 요소는, 첫째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 행위자들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들도 관여한다는 점, 그리고 둘째, “정치적인 것의 본성은 다소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정치는 얼마간 미지의 정치적 객체들에 의해 촉발되기에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항구적인 놀라움의 문제”이고 미리 구상된 프로그램의 실현이 아니라 일종의 실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라투르의 비근대주의적 정치 이론은 “정치철학의 미래”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

끝으로,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은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고 유머 감각이 여실히 드러나는 하먼의 문체 또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스포츠 기사를 작성하는 작업에 관여했던 하먼은 다수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용어와 표현을 그저 제시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실례와 반사실적 에피소드를 곳곳에 배치하여 철학서에 이야기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임과 동시에 읽는 재미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맥도날드의 인도 영업 책임자로서 힌두교 신자를 대하는 지젝, 스트라우스, 벡, 슈미트의 정치적 접근법과 라투르의 접근법을 극명히 비교하는 에피소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라투르의 정치철학이 갖는 독특한 점을 즉시 인식하게 된다.

김효진 
번역가.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자본세 기후변화와 세계관의 변천사에 관심이 많으며, 블로그 ‘사물의 풍경’에 관련 글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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