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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로 풀어본 2004년
사자성어로 풀어본 2004년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4.12.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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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내내 귀막은 채 ‘黨同伐異’… 정파 세력간 ‘支離滅裂’

세밑마다 한 해를 사자성어로 풀어보는 것은 이제 교수신문만의 전통이 됐다. 2001년에는 ‘五里霧中’, 2002년에는 ‘離合集散’, 2003년에는 ‘右往左往’이 한 해를 특징짓는 사자성어로 선정돼, 당해 한국사회 궤적을 가장 적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평가받았다. 2004년 역시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사자성어로 풀어보는 2004년’을 준비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사자성어 선정을 공정히 하기 위해 일차로 권중달 중앙대 교수(사학과), 김열규 계명대 석좌교수(국문학과), 김원중 건양대 교수(중문학과),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과),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학과)로부터 총 16개의 사자성어를 제시받았다. 이후 20명의 교수신문 필진에게 사전 설문조사를 실시해 12개의 사자성어로 압축하고, 본격적인 설문조사에 들어갔다. 설문조사에는 총 1백62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지금으로부터 1백년이 지난 시점에서 2004년 한국의 풍경을 담아 놓은 역사책을 들춰본다면 과연 그 서문은 어떠한 단어로 시작될까. 중국 後漢의 역사를 ‘黨同伐異’로 규정한 『後漢書』「黨錮列傳」서문처럼 그렇게 우리 시대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교수신문이 지난 15일부터 21일까지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일간지 및 지역 신문 칼럼니스트 교수 1백62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2004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사자성어로 ‘黨同伐異’(19.8%)를 꼽았다. ‘같은 무리와는 당을 만들고 다른 자는 공격한다’는 의미처럼 2004년 한국사회 구성원은 주장하는 사실의 정당성과 합리성은 상관없이 정파적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배척하는 데 몰두했다는 것이다. 이어 ‘支離滅裂’(16.0%)과 ‘泥田鬪狗’(16.0%)가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사자성어로 선정됐고, ‘進退兩難’(8.0%), ‘理判事判’(8.0%)가 뒤를 이었다.

‘너는 어느 편이냐’가 중요했던 사회

‘정쟁’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2004년 한국 정치 현실은 ‘당동벌이’의 대표격이다. 연초부터 대선자금 문제로 곤경에 처한 한나라당은 참회어린 반성보다는 오히려 대통령을 몰아세웠고, 대통령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야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진검’을 휘둘렀지만 대화를 통한 정치적 해결은 하지 못한 채 사법부의 힘을 빌렸다.

국토균형 발전의 기회로 여겨진 수도 이전 추진에서도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부 여당은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국민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채 수도 이전을 ‘강행’했고, 한나라당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총선 이후 태도가 돌변해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을 ‘반대’했다. 국토균형발전이라는 거시적 시각은 자취를 감췄고 거리에는 주판알을 튕기며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만이 카메라 렌즈에 포착됐다. 이용재 서양사학회 강사(서양사)는 “여권은 개혁 조급증 때문에 야권은 보수 기득권 집착으로 인해 국민여론을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하면서 세몰이에만 급급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치권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당동벌이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일상화된 풍경이었다. 인터넷에 게재된 뉴스 댓글과 토론장은 언제나 ‘우리 편’과 ‘네 편’으로 갈렸다. 한나라당과 보수신문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이는 ‘노빠’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는 이는 ‘수구꼴통’으로 낙인 찍혔다. 주장의 사실성과 논리성은 논외였고, 중요한 건 ‘어느 편이냐’였다. 정준영 동덕여대 교수(교양교직학부)는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비슷한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결집이 용이해지고 그 결과 상반된 입장 사이에 교류가 일어날 수 있는 장이 상대적으로 폐쇄되면서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좁아져 갔다”라고 분석했다.

2004년 한국사회는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즉 ‘지리멸렬’로 풀이되기도 한다. 비정규직 8백만 시대와 청년실업률 7.3%라는 수치를 제시하지 않아도,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의 풍경에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처방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됐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대해 조원희 국민대 교수(경제학부)는 “한국경제 정책은 그야말로 정책부재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무대책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청와대에서는 균형발전·혁신주도경제·동북아중심·사회통합형경제 등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려 했지만, 내수부진, 신용불량자문제, 투자부진 등은 정부의 발목을 붙잡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지리멸렬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남북관계, ‘支離滅裂’

반 세기 이상 숙제로 남아있는 남북관계도 세밑을 향할 수록 흐릿하기만 했다. 2004년 상반기에는 남북장관급 회담과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등이 열려 대화가 활발했고, 룡천역 폭발사고 시에는 남한의 지원이 이어져 남북관계는 봄빛이었다. 하지만 지난 7월 이후 남북관계는 공식대화없이 단절된 상태가 지속돼 답답함을 더했다. 6자 회담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 안상헌 충북대 교수(철학과)는 “북한문제, 경제난국, 정치개혁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모두 지리멸렬한 상태로 또 한 해를 넘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교수들은 심화되는 경제불황과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자거리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정치현실을 두고, 2004년을 ‘泥田鬪狗’의 해로 정리하기도 했다. 백일 울산과학대학 교수(유통정보학과)의 경우 “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으로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공동체는 각기 생존해야 하는 최악의 이기주의 시대에 정치집단은 지역주의에 편승해 정치적 이해에 사활을 거는 이전투구에 전념했다”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모든 행위를 ‘싸움박질’ 수준으로 폄하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경진 대구가톨릭대 교수(언론광고학부)는 “정당한 지적도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 붙이는 이전투구에는 섬뜩한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라고 경계했다. 그래서일까. 2004년의 갈등과 반목을 역사를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노력으로서 ‘臥薪嘗膽’의 해로 보자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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