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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 vs 하버마스 (세창프레너미 10번)
가다머 vs 하버마스 (세창프레너미 10번)
  • 김재호
  • 승인 2021.06.11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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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원 지음 | 204쪽 | 세창출판사

가다머는 인간의 ‘이해’가 선입견의 영향 아래 발생한다고 여겼다. 반대로 하버마스는 뒤에 가려진 문제를 밝혀내고 바로잡는 ‘비판적 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선입견이 이해의 뒤에 숨어 있다면,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해와 진리, 비판과 반성으로 맞부딪친 가다머와 하버마스. 두 사상가의 치열한 논쟁 속에서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려는 겸손’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용기’ 모두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에게 영향을 주며 자신을 성장시켜 온 대가들을 비교・대조하여 그들의 삶과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프레너미(Friend+Enemy) 시리즈. 의사소통과 이해의 영역에서 두 사상가가 남긴 논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해의 숙명 앞에서 맞부딪친 두 사상가, 가다머와 하버마스
‘한계를 인정하려는 겸손’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용기’의 충돌
과연 인간에게 선입견 없는 이해가 가능할까?

가다머와 하버마스, 선입견을 두고 논쟁하다

가다머는 학문을 포함하는 우리의 모든 정신활동을 ‘이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이해는 필연적으로 앞선 판단, 즉 ‘선입견’의 영향 아래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적 방법으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해의 발생과 경험, 그 자체가 바로 ‘진리 경험’인 셈이다.

하버마스는 어떤 것의 이면이나 배후의 문제를 밝혀내고 바로잡는 ‘비판적 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선입견이 이해의 바탕인 한, 그것 역시 비판적 반성의 대상이며, 그런 과정도 없이 이해를 진리와 결부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 지적한다.

인간의 선입견을 둘러싸고 벌어진 두 사상가의 논쟁. 우리는 선입견 때문에 사물이나 상황을 제대로 못 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선입견 없는 이해가 가능할까?

우리의 말과 생각에 깊이 뿌리내린 전통도 선입견일까?

가다머는 전통이 ‘정당한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통이란 그저 ‘부당한 억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군대나 학교, 회사에서 볼 수 있는 군기 잡기, 부조리 등이 부당한 억압에 속한다.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거나 역사적 반성으로부터 형성된, 순기능을 발휘하는 전통은 정당한 권위를 갖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가다머는 이렇게 이어진 전통이 선입견으로 작동하며, 민족, 국가,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고 서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전통의 형성으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없을지 항상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의 전통이 변화할 때는 ‘이전의 전통으로부터 얻는 교훈, 역사가 주는 가르침’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해의 배후에 있는 전통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전통이라는 선입견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일까?

정신분석으로까지 번진 두 사상가의 논쟁
‘전이 상황’과 ‘놀이’

두 사상가의 논쟁은 ‘정신분석’의 영역까지 번진다. 로렌처의 ‘장면적으로 이해하기’란 ‘실제 상황’, ‘전이 상황’, ‘유아기 상황’ 세 단계로 이루어진 정신분석의 한 방법이다. ‘실제 상황’은 지금 환자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단계이고, ‘전이 상황’은 환자가 겪은 일 때문에 화가 번진 일을 말하는 단계이며, ‘유아기 상황’은 환자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유아기의 기억을 찾는 단계이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전이 상황’에 주목했다.

‘전이 상황’에서는 의사가 두 가지 역할을 맡게 된다. 하나는 환자와 의사소통하는 내부의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의사가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제3자의 눈으로 조망하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런 ‘전이 상황’에 주목하여 우리의 의사소통에 참여와 관찰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보이고, 의사소통 과정에서 선입견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가다머는 반대로 의사소통은 ‘놀이’일 뿐이라며 ‘전이 상황’처럼 작위적인 대화는 의사소통이 아니라고 응수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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