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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대구의 시간을 찾아서
전태일, 대구의 시간을 찾아서
  • 양진오
  • 승인 2021.06.23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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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⑭

“우리는 전태일의 대구 시간을 제외한 채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디 전태일만 그러할까? 많은 이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지역을 간과해 왔다. 
기쁨의 원천으로서 지역을 이야기해야 한다.”

북성로대학 인근에 모디라는 이름의 공간이 있다. 모디, 인도 총리의 이름이 아니다. 적어도 북성로에서는 그렇다. 경상도 지역어로 ‘함께 하자’라는 뜻을 지닌 모디는 기부 카페이다. 모디가 입점한 건물 이름이 ‘7549’이다. ‘7549’를 풀면 이렇다. ‘75’는 1975년도의 ‘75’이다. ‘49’는 4월 9일의 ‘49’이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덟 분이 무고하게 돌아가신다. 그분들의 유족이 명예 회복을 위해 받은 국가지원금으로 건물 ‘7549’를 매입했다. 유족들은 지역의 NGO 단체에 이 건물 공간을 제공한다. 이 건물 2층에 대구참여연대가 터를 잡게 된 까닭이 이렇다. 이 건물 3층에는 청소년단체 반딧불이가 입주하고 있었다. 2020년 반딧불이가 해산하면서 민주시민교육단체 모디가 만들어진다. 

2020년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 기부 카페 모디가 ‘북성로 인생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리기 교실, 만들기 교실, 소소한 마을잔치가 ‘북성로 인생학교’의 주요 사업이었다. 나는 소소한 마을잔치에 초대되어 모디를 출입하게 되었는데, 실제 이 공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신화가 되어버린 노동열사 때문에 그렇다. 그 노동열사의 이름이 전태일이다. 인혁당 사건을 먼저 말해야겠다.

기부 카페 모디의 내부 풍경. 카페 모디는 대구 북성로 마을 사람들을 좋은 이웃으로 연결해주는 마을 나눔터이자 마을 학교이다. 전태일 열사도 모디의 이웃이다. 사진은 2020년 10월 20일 촬영. 사진=양진오

인혁당 사건은 조작 사건이다. 1974년 1월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8인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이들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의 배후로서 인혁당을 조직하여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거다. 민청학련, 인혁당 모두 용공 조작 사건이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이 8인에 대해 사형판결을 확정한다. 다음날 9일 사형이 집행된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 있다. 김원일의 장편 푸른 혼이 그것이다. 푸른 혼은 작가 김원일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 여덟 분의 민주 영령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다. 기부 카페 모디가 입점한 건물의 사연이 이렇다.

“학교입학 얘기를 꺼냈다. 태일은 '뛸 듯이 기뻤다'고 수기에 썼다.”

이제부터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전태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전태일재단 홈페이지(http://chuntaeil.org)는 전태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써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노동운동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활동을 비롯해 민주노동운동의 발달에 있어 근원이 되었습니다.”

전태일재단 홈페이지는 전태일을 ‘생명’, ‘노동운동’, ‘군사독재정권’, ‘노동조합’ 등의 언어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전태일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상식에 부합한다. 그런데 전태일은 이렇게만 정의될 수는 없다. 전태일의 대구 시간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기부 카페 모디의 김채원 대표가 비영리단체 ‘전태일의 친구들’의 상임이사이기도 하다. 모디는 기부 카페이면서 한편으로는 전태일의 대구 시간을 복원하기 위해 조직된 비영리단체 ‘전태일의 친구들’의 활동 공간이다. 전태일에게 대구의 시간이란 게 있었다.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전태일 평전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1962년의 가을과 겨울은 이렇게 지나갔다. 해가 바뀌어 1963년, 태일의 나이 열다섯이 되었다. 그는 온종일을 집에서 아버지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이 가고 앞산의 흰 눈이 녹기 시작할 무렵, 꿈같은 일이 생겼다. 어느 날, 큰집에 다녀온 어머니가 태일이의 학교 입학 이야기를 꺼냈다. 태일은 이때 “뛸 듯이 기뻤다”고 수기에 쓰고 있다. 1963년 5월, 신학기가 2개월가량 지났을 때 태일은 당시 대구 명덕국민학교 안에 가교사를 두고 있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원도심 골목을 답사하는 이유

이 대목은 전태일의 대구 시간이 지니는 본질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전태일은 대구에서 뛸 듯이 기뻤다. 벗들과 함께 배울 수 있었고 벗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었다. 1962년 대구의 하루하루가 전태일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태일이 기쁨으로 체험한 대구의 시간을 복원할 목적으로 전태일 가족들이 잠시 살았던 대구 남산동 집을 매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는 몇 번에 걸쳐 소액 기부를 했다. 또 전태일의 남산동 집과 명덕교 일대를 자주 답사했다. 2020년 11월 12일 전태일이 잠시나마 살던 이 집을 매입해 문패를 다는 행사가 열린다. 

전태일 열사 대구 남산동 집에 내걸린 문패. ‘전태일의 친구들’이 주도한 전태일 문패 달기 행사는 전태일의 대구 시간을 복원하는 의의가 있다. 사진은 2020년 11월 12일 촬영. 사진=양진오

이 행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태일의 삶이라는 게 한국노동운동이라는 언어로만 규정될 수 없어서이다. 그의 삶에는 대구의 시간이 있었다. 말하자면 사람의 삶은 시간의 총합으로 정의되거나 기억될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는 전태일의 대구 시간을 제외한 채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디 전태일만 그러할까? 많은 이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지역을 간과해 왔다. 기쁨의 원천으로서 지역을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북성로대학 프로젝트의 명분으로 원도심 골목을 답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과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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