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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회의 안과 밖: 윤지선에 대한 두 번째 답변
철학회의 안과 밖: 윤지선에 대한 두 번째 답변
  • 이충진
  • 승인 2021.07.20 09: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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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충’의 발생학」 논란, 이충진 교수 마지막 기고

지난 5월 4일 ‘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를 통해 「’관음충’의 발생학」 논문을 둘러싼 학술 논쟁에 불씨를 지폈던 이충진 한성대 교수(철학)가 마지막 글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윤지선 교수에 대해 "'한국 여자들은 디지털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지식인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 구성원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라는 윤지선의 주장에 나는 100% 동의한다"면서도 "(반면) 학자가 학문의 장에서 비학문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관철하려는 시도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철학연구회에 대해서는 "첫 번째 기고문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철학회는 철학의 외부에서 자신을 향해 제기되는 (학문적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라'라는 것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조용해지길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철학자가 아닌) '철학회의 사회적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썼다. 논문에 대해서는 가톨릭대가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사건을 넘겨 받아 연구윤리 조사 중이다.

 

 

 

윤지선의 논문과 관련하여 쓰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글이다. 그의 두 번째 기고문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며 굳이 글을 또 쓰는 이유는 ‘반지성적 파시스트’로 낙인 찍히는 것이 억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글의 독자는 윤지선이 아니라 학자 세계의 구성원인 셈이다.

 

'윤지선 논문 사태’에 관하여

 

윤지선의 두 번째 기고문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하다. 마침 박강수 기자가 정리한 것도 있고 특히 ‘혐오 문제’에 관한 것은 이준효의 논문(「페미니즘과 테러리즘」, 『철학적 분석』, 한국분석철학회, 2021)을 보면 충분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는 해도 최소한의 것은 확인해 두도록 하자.

첫째, 철학연구회는 보겸에게 (도덕적-법적 잘못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불철저함)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 학회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위상의 차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유튜버들이 뭐라 이야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장은 분명하다. 이유는 이미 이야기했다.

둘째, 내가 말하는 ‘혐오 논문’은 혐오 용어를 사용하여 작성된 논문이며 혐오를 목적으로 작성된 논문이 아니다. 내 글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셋째, 만일 윤지선의 논문이 (내가 말하는) 혐오 논문이라면 그것은 학술지에서 철회되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해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한 규범적 판단을 하려면 사실적 정보(학회 규정, 철학계의 선례, 학계의 일반적 관례 등)가 필요한데,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질 이유도 없다.

넷째, 윤지선이 말하는 “[철학연구회를 향한] 사과 종용과 논문 퇴출 압박”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철학자의 세계에 종용과 압박은 존재하지 않는다. 40년 전 은사님들께 배운 것 중의 하나이며 30년 넘게 몸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더욱이 철학연구회 임원들이 내 글에 압박감을 느낄 것이란 말은 분명 그 분들에 대한 인격 모독이다.

다섯째, ‘한국 여자들은 디지털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지식인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 구성원은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라는 윤지선의 주장에 나는 100% 동의한다. 반면에 학자가 학문의 장에서 비 학문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관철하려는 시도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학계의 파시즘화를 방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생각이 반지성적이라면 나는 기꺼이 반지성주의자가 되겠다.

여섯째, 철학자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나는 윤지선의 입장(대중에 대한 비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아는 것(bekannt)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erkannt)이 철학이 하는 일이다’라는 헤겔의 말은 내게 두 개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는 독사(doxa)와 에페스테메(episteme)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지식인은 일반 대중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후자 역시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다. 지식인이 대중보다 진리에 더 가깝게 있다고 여기는 계몽주의적 오류를 내가 평생 경계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보이루’ 문제와 달리 나는 혐오 문제에 대한 대중의 생각(“자연적-일상적 사유 진행”)에 관심이 없다.

이제 ‘마지막 글’임을 핑계 삼아 몇 가지 말을 덧붙이도록 하자. 첫 번째 글에서 못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자 한다.

 

'이상한 철학자’, 그리고 그들이 모인 철학회

 

“[나의] 비판철학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철학이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리들에 의거한 참된 철학 체계는 오직 하나만이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1797년 칸트가 한 말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참된 철학 체계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어느 철학자도 자신의 철학을 새롭게 내세울 이유가 없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선보인다는 것은 기존의 철학이 모두 오류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세계엔 언제나 피냄새가 진동한다.

1929년 하이데거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라는 제목의 책을 발표했는데, 후대의 칸트 연구가들은 그 책을 가리켜 ‘칸트철학에 대한 부당한 왜곡과 폭력’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칸트 이해는 엉터리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독(誤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 이해에서도 발견되니, 어쩌면 차라리 ‘폭력적 오독’이야 말로 철학 발전의 동력이자 필수 조건이라 말할 만하다.

다른 철학자에 대한 오독이 철학 자체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철학자의 기질에 기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너도 참이고 나도 참이다’라는 생각은 철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글자 그대로 생사 투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철학자들 중엔 이상한 사람이 많다. 좋게 말하자면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가령 플라톤 텍스트를 성경처럼 읽는 사람부터 학자의 활동에 상거래법을 적용하겠다는 사람까지 철학자의 스펙트럼에는 실로 한계가 없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 역시 자신을 철학자로 생각할 것이 분명하니, 안 그럴 수가 없다.

이렇듯 다양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것이 철학회이니, 철학회라고 이상하지 않을리가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철학회에 모여서 철학 활동을 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동료 철학자가 있어도 철학자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말기 때문이다. 철학회는 그 정도의 이질감을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저것도 학회인가?’라는 의구심 어린 눈길을 받기도 한다.

문제는 철학회가 철학의 외부와 만날 때 일어난다. 개인 철학자와 달리 철학회는 타자(다른 학회, 연구재단, 언론, 일반인 등)와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만남이 철학회에게 수월할 리가 없다는 것은 그 구성원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그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달리 말해서 철학회가 타자의 요구(조직과 규정, 정기적 학회, 일정 수준의 학술지 발간 등)를 성공적으로 이행하면 철학회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모든 회원을 대표하는 유일 주체의 자격과 대내적으로는 회원에게 특정한 의무를 부가하는 권한이 그것이다.

전자, 즉 대외적으로 활동하는 공적 조직으로서 철학회는 더이상 ‘철학자의 이상함’을 자신의 고유성으로 가질 수 없다. 가령 자신의 활동에 대해 외부에서 비판과 질책이 제기되는 경우 철학회는 ‘철학적 고유함’으로 도망갈 수 없다. 철학회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전체 학회, 한국 사회 등)의 규범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공론장에 참여한 철학회가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해당 공론장의 언어(학문 일반의 언어, 일반인의 언어 등)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 철학자, 철학회는 대략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윤지선의 논문으로 돌아가보자.

 

학자가 ‘그러려니’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

 

명예훼손이나 혐오 표현과는 결이 다른, 그러면서도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비판은 역시 윤지선 논문의 학문성에 관한 비판이다. 그 중 하나가 연구 방법의 적절성에 관한 것이다. 윤지선은 이른바 ‘발생학’이란 이름 아래 곤충학을 설명 모델로 선택했는데, 그가 논문에 서술한 관련 내용들이 함량 미달이라는 사실은 금방 확인되었다. 이 점을 근거로 ‘윤지선의 논문은 수준 이하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곤충학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철학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거꾸로 말하면 곤충학 관련 지식의 부족이 철학 논문의 자격을 결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철학자가 곤충학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 점에선 윤지선이나 데란다나 들뢰즈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윤지선이 선택한 연구 방법이 철학적 연구 성과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곤충학에 대한 그의 비전문성이 문제될 것은 없다. 방법(methode)은 어원상 길(道)이며 길은 연구자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면 될 뿐, 그것이 평탄하든 아니든 그 점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윤지선의 방법은 그를 목적지(연구 결과)에 성공적으로 이끌었는가?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그의 논문에서 곤충학 관련 부분을 모두 제거해보면 된다. 이러한 제거 이후 남은 부분이 논의 진행과 논의 내용 측면 모두에서 학문성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논문에서 곤충학에 관한 언급은 불필요한 것으로 판단해도 된다. 반면에 논의 진행이 불가능해지고 논문 내용에 심각한 하자가 등장하면 우리는 그것을 논문에 필수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 실험은 곤충학에 관련된 윤지선의 언급이 비전문적이거나 심지어 오류라고 해도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다.

만일(!) 전자라면, 즉 윤지선의 연구 방법과 연구의 진행·내용·결론 사이에 내적인 연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방법을 선택했을까?’라는 당연한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과대 포장 비판’이다. 몇몇 사람들은 윤지선이 자신의 논문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아무 관련 없는 이론, 불필요한 개념,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동원했다고 생각한다. 명백한 “지적 사기”(소칼)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동의할 것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쩌면 철학 논문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포스트모던 계열의 철학 논문에서 특히 많이 일어난다.

그런데 설사(!) 윤지선의 논문이 일종의 지적 사기라고 해도 그것만을 근거로 논문의 학문적 자격(Quality)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지적 사기가 ‘무덤에 회칠하기’가 아니라 ‘얼굴에 화장하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대 포장이 곧 상품의 불량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중요한 것은 현란한 표현에 현혹되지 않고 논문의 실체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있을 지도 모를!) 과대 포장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도 된다.

이와는 달리 철학자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논문의 내적 통일성이다. 방법의 적절성, 내용의 수준, 결론의 설득력 등 다른 부분이 아무리 좋아도 논증의 형식적-내용적 논리성이 확보되지 않은 글은 논문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가설(전제)과 결론 사이의 논리적 공백을 메우는 것이 논증인데, 이것에 오류가 있는 글은 소설일 수는 있어도 학술 논문일 수는 없다. 제대로 된 논증을 갖추지 못한 논문을 보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결코 학자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윤지선의 논문은 이 부분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철학회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적 주체로서의 철학회는 공동체의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철학회는 전체 학계와 한국 사회 안에서 예외적 위상을 가질 수 없다. 특정 사안과 관련해서는 철학회의 ‘그러려니’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윤지선 논문의 명예훼손과 혐오 표현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윤지선이 아니라) 윤지선의 논문이 보겸의 명예를 훼손시켰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철학계 내부의 에토스에 주목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이것은 철학계와 철학의 외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안에 관해서 철학회가 ‘철학적 목소리(그러려니)’를 낼 수는 있겠지만 철학의 외부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철학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실적으로만이 아니라 원리적으로도 그렇다.

윤지선 논문의 문제가 불거진 이후 철학의 외부에서 들려온 목소리 중의 하나는 3인의 심사자와 철학회 임원들을 향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자가 철학 논문을 가지고 동료 철학자나 죽은 철학자가 아니라 ‘외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과연 어느 철학자가 했겠는가? 그런 가능성에 대한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 아예 없는데 어떻게 그들이 ‘보이루’를 걸러낼 수 있었겠는가? 분명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대책 회의가 해당 각주의 정확한 변경을 지시하지 않은 것은 진정 아쉬운 부분이다. 명예훼손의 가능성이 충분히 인지된 상태에서 이뤄진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학자의 시선과 일반인의 시선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고려했더라면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던 잘못이었다.

혐오 문제도 상황이 비슷하다. 내가 아는 한 학술지에 발표된 철학 논문이 혐오 논문의 혐의를 받은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최초의 사건이며 따라서 최초의 것으로 다뤄져야 함이 마땅하다.

어떤 논문이 혐오 논문인가?, 이 논문은 혐오 논문인가?, (혐오 논문인) 이 논문은 학술지에 게재될 수 없는가? 등은 각기 다른 물음이다. 첫째는 기준에 관한, 둘째는 기준의 적용에 관한, 그리고 셋째는 적용의 결과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관한 물음이다. 이러한 상이성 때문에 첫째와 둘째로부터 셋째가 자동적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논문이 혐오 논문으로 판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부터 그 논문의 게재 불가능성이나 게재 철회의 필연성이 귀결되지는 않는다(이 점은 철학회가 혐오 논문을 자신의 학술지에 게재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이익을 스스로 감수하는 경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명예훼손의 경우처럼 혐오 문제에 있어서도 그 모든 것, 즉 기준의 마련과 적용 그리고 현실적 구현은 철학회와 철학의 외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철학회는 (자신과 타자 모두를 구성원으로 가지는) 공동체의 규범에 따라 그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결정과 관련해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설명을 요구하거나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경우 철학회는 반드시 그에 응해야 한다. 그것은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이행해야만 하는 규범적 의무이다.

 

학회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무

 

첫 번째 기고문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그것, 즉 ‘철학회는 철학의 외부에서 자신을 향해 제기되는 (학문적이 아니라) 사회적 요구에 응답하라’라는 것이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회의 사회적 책무를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조용해지길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한국의 [철]학회가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읽[히지]”(김우재 교수) 않겠는가?

윤지선의 논문이 야기시킨 사회적 논란은 지난 몇 달 동안 언론을 거쳐 국회와 행정부로 확산되었다. 가톨릭대에서 연구윤리 심사를 진행 중이라고 하니, 그 결과로부터 철학연구회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심사 결과 및 추후 조치가 어떤 것이 되든 그 모든 것을 철학회가 먼저 자발적으로 실행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철학회와 철학계와 철학자는 철학 외부의 강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사족: 윤지선을 보며 내가 느낀 답답함을 그는 내 글을 읽으며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과의 논쟁은 어리석은 짓이다’)에 따라 나는 이제 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려 한다.

 

 

 

이충진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행복 철학』(2020),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2015), 『이성과 권리』(2000) 등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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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진 2021-07-20 14:24:28
이 사안에 대해 다시 글을 써야 한다면 개인 블로그에 쓰겠습니다. '지면의 품격을 떨어뜨려선 안 된다'라는 부담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군요. 생산적인 대화는 언제든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