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8:20 (금)
한 독문학자의 삶이 오롯이 담긴 ‘확장된 교양소설’
한 독문학자의 삶이 오롯이 담긴 ‘확장된 교양소설’
  • 김재호
  • 승인 2021.07.27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 인터뷰_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의 『도동 사람』(부북스 | 632쪽)

일반적 교양소설이 성장과정과 완성만을 보여주는데 반해
‘도동 사람’은 그 이후 삶까지 확장해 보여주는 성장·화해 소설

“어떤 독자가 이 소설을 읽고서 사람 살아가는 모습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조금이라도 성찰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지난 5일, 서울 낙산공원 부근 ‘도동재’에서 인터뷰한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독문학)는 이같이 말했다. 그는 최근 『도동 사람』이란 두툼한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글에는 그 사람의 인품이 묻어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의 문장들에는 작가로서의 그의 겸양과 인생에 대한 체관(諦觀)이 스며 있는 듯하다. 

안삼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소설을 통해 한 인물이 거쳐온 시대의 질곡과 소명을 다뤘다. 그는 ‘성의정심’의 선비정신을 강조했다. 벽돌담에 새겨진 '도동재'는 도동마을을 뜻하며, 현재 안 교수는 도동재 현판(아래 사진 참조)이 걸린 서울 낙산에 살고 있다. 사진=김재호

안 교수는 젊은 시절부터 한평생 간직해 온 소설쓰기 꿈을 이제야 이뤘다. 그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독일 본대학에서 독일소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일평생 교수라는 직함으로 활동해 오다, 이번에 평생 소설을 공부해 온 학자의 ‘작은 실천’으로서 이 작품을 쓴 것이다. 

안 교수는 “문학의 힘, 특히 장편소설의 힘을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작가도 인생세사를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라며 "다만 독자가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삶의 한 방식을 작게나마 또는 크게 깨달을 수 있게끔 인간 세사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진실되게 잘 구성해 놓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학의 힘, 특히 장편소설의 힘을 믿어요

안삼환 교수는 “신이 더는 이 세상의 운행을 섭리하시지 못하는 현대 세계에서는 소설가가 예전의 신과 같이 인간의 나아갈 길을 훤히 밝혀주어야 한다는 루카치의 소설 이론이 우리 시대에는 더는 맞지 않는다”라며 “소설이 인류의 미래를 선도하면서 전망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너무 교조적이고 비민주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한평생 논문이나 강연문, 저서 등 글을 써온 안 명예교수는 “어떤 글이든지 간에 글을 쓰려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바쳐서 써야 한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그는 자신이 『새 독일문학사』(세창출판사, 2016)를 집필할 때, “우선 나 자신이 아는 것만을 진실하게 풀어써 놓은 다음, 나중에 독일에 직접 가서 책 제목, 인명, 지명, 연도 등을 일일이 확인, 보충해 넣었다”고 했다.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장면은 시간강사 얘기

『도동 사람』에서 독자들에게 특히 소개하고 싶은 장면이나 에피소드가 있는지 물었다. 안 교수는 제일 먼저 시간강사 관련 문제라고 답했다. 그 역시 잠시나마 시간강사의 고달픈 생활을 거친 바 있고, 교수가 되고 나서는 시간강사 후배들의 곤궁한 처지를 많이 걱정해 왔다. 그는 서울대 명예교수이지만 시간강사들의 일자리를 뺐지 않기 위해 퇴임 이후에는 어떤 형태의 대학 강의도 일절 맡지 않았다. 그는 “대개 교수가 되면 자신이 시간강사였던 시절을 잊는다”라며 “교사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통해 단체교섭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학 시간강사는 사일로(silo) 내부처럼 각 학과에 수직적으로 소속돼 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타과 동료들끼리 횡적 유대관계를 가질 여건이 안 된다”라고 대학 시간강사들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한, 안 교수는 『도동 사람』속에서 자취생이 마침 간장을 담아나를 용기가 없어서 집안에 내려오던 조선 백자에 간장을 담아 통학 시간의 기차를 탔던 일화도 언급했다. 비좁은 기차간에서 학생들이 서로 밀고 밀리는 바람에 매화문(梅花紋) 백자의 호리병 주둥이를 깨뜨려 낭패를 당했다. 가난한 자취학생과 깨진 조선 백자 주둥이는 한국 100년 최근세사의 상징이기도 하다고 안 교수는 설명했다. 

아울러, 안 교수는 소설에서 주목하는 장면으로 주인공 동민이 독일 튀빙엔대 총장을 만난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동민은 총장을 만나 폐과될 뻔했던 튀빙엔대 한국학과를 잘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안 교수는 동민이 독일 전 총리 슈뢰더와의 만남 등을 통해 퇴임 후에도 여러 단역을 기꺼이 감당해 왔던 성의정심(誠意正心)이 깃든 선비정신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학평론가 임홍배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는 ‘격동의 시대를 헤쳐온 학자의 길’이라는 작품해설에서 “(독일의) 전통적 교양소설과 비교하면 『도동 사람』은 주인공 동민의 평생에 걸친 분투와 정진의 과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매우 큰 폭으로 확장된 교양소설”이라고 밝혔다. 전통적 교양소설은 주인공이 결혼을 하거나 본업에 진입하면 대개 끝나고 마는데, 『도동 사람』은 주인공의 유년시절은 물론, 만년의 체관(諦觀)과 죽기 직전까지의 숨은 앙가주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동’의 의미에 대해선 동네를 도동으로 부르기 시작한 경상북도 영천 도동(道東) 마을의 입향조(入鄕祖) 안증(安嶒)(1494~1553)의 선비 정신이 담겨 있다고 풀이하면서, 임홍배 교수는 “더 넓게 보자면, 도가 동쪽으로 이동한다는 말은 동방의 나라에서 도를 바로 세우고 실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고 밝혔다. 안동민이 독어독문학을 전공했지만 그 뿌리를 도동에 두고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를 위해 힘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도동 사람』은 작자(안동민)와 독자(허경식), 스승(안동민)과 제자(허경식), 현실(안삼환)과 허구(안동민), 부모(안병규)와 자식(안동민), 서구사상(독일문학)과 동양사상(유교정신) 등이 중첩되는 서사 구조인데, 그 각각의 대립쌍은 서로 갈등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나감으로써, 결국 화해하고 지양(aufheben)해 나가는 관계다. 독자이며 제자인 허경식은 처음에는 다소 원망스럽고 귀찮은 심정으로 고인의 원고를 읽어 나가다가 차츰차츰 글쓴이의 의도를 읽어내고 스승에 대한 원망을 거둬들인다. 또한, 이 소설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효심으로 받들되, 자신의 독자적 갈길을 찾아가며, 동양사상은 서구사상과 접목되어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결국 이 소설은 동양과 서양을 넘나든 한 학자의 경험 세계가 ‘확장된’ 교양소설의 형식 안에 담긴 ‘학자소설’이라 하겠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도동재'라는 현판은 소설에도 등장한다. 이 현판은 실제 안삼환 교수의 서울 낙산 집 마당에도 걸려 있다. 사진=김재호

소설 『도동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팬데믹까지 100년의 학자 이야기

주인공 안동민과 그의 제자 허경식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안동민은 독문학자로서 한 평생 대학교수로 살았다. 허경식은 안동민의 지도 하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결국 교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강사의 삶을 살았다. 허경식은 시간강사의 삶을 벗어나고자 1인 출판사를 차렸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승 안동민이 연락을 해온다. 본인이 쓴 원고를 출간해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도동 사람’은 주인공 안동민이 끝내 완성하지 못한 소설 원고다. 결국 그의 제자 허경식이 원고를 정리하여 출간해 낸다. 허경식은 한평생 안동민을 원망해 왔었다. 안동민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강의실에서 그가 선생으로서 입밖에 낸 말 한마디 한마디는 허경식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엄혹한 유신시대에 안동민이 강의실에서 내뿜은 “무모한 설교” 때문에 허경식은 운동권 학생이 되었고, 강제 징집되어 고생을 하고 제대 이후에도 오랜 시간 방황하던 끝에 결국 일종의 ‘적개심’과 ‘복수심’을 품고서 뒤늦게 다시 안동민의 문하로 들어가 소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나중에 허경식은 인문계 시간강사의 굴욕적 현실을 박차고 나와 곽우(藿友) 출판사라는 1인 출판사 사장으로 독립한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출판사로 찾아온 안동민의 달갑잖은 부탁을 통해 다시 그와 운명적으로 엮이게 된다. 안동민의 사후에 그의 미완성 소설 원고를 읽고 정리해 나가는 중에 허경식의 ‘적개심’과 ‘복수심’은 차츰 누그러져서 마지막에는 고인에게 다소 ‘감사하는 마음’까지 느끼게 된다.

이 소설에서 허경식은 이미 고인이 된 안동민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대신 독자들에게  얘기해주는 인물로 비친다. 허경식이라는 인물은 독자들로 하여금 안동민이란 한 인물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의 삶의 깊은 의미를 되새겨 보게끔 하고, 그의 언행과 처신을 새삼 다른 각도에서도 바라보게끔 유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은 1910년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해방과 미군정 시기, 대구 10.1 사건, 남북 분단, 2.28 학생의거와 4·19 혁명, 3·24 학생시위와 6·3 항쟁, 유신체제, 광주민주화운동, 신군부 독재, 6월 민주항쟁, 2018 남북정상회담, 2020년 팬데믹 상황까지 주인공 안동민이 헤쳐온 한국 현대사가 담겨 있다. 안병규의 삶에서부터 그의 아들 안동민의 일생까지 약 100여년의 시간이 다루어 지고 있다. ‘도동’은 경상북도 영천시의 도동 마을을 뜻한다. 안동민은 도동에서 나고 자랐으며, 만년에는 서울 낙산의 우거(寓居) 도동재(道東齋)에서 안빈낙도하는데, ‘도동재’라는 현판 글씨는 그의 동학이며 절친인 서예가 지평(至平) 선생이 써줬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