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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 하얼빈공대 교수"과학없는 인문학, 순수인문학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김우재 하얼빈공대 교수"과학없는 인문학, 순수인문학이라는 건 세상에 없다”
  • 박강수
  • 승인 2021.08.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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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과학의 자리』 쓴 김우재 하얼빈공대 교수

 

김우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 교수의 본업은 초파리와 꿀벌의 유전학 연구다. 그는 “실험실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부업은 글쓰기다. 황우석 사태부터 코로나19 백신음모론까지, 한국사회의 과학적 합리성이 흔들릴 때마다 앞장서 발언해 왔다. 그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쓸 것 같다”고 말한다.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와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글쟁이’, 두 가지 정체성의 오래된 공존은 다음과 같은 신념의 산물이다. “모든 학문은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서만 기능하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다.”(『과학의 자리』, 392쪽) 과학도 마찬가지다. 아니, 과학이야말로 사회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의 그의 믿음이다.

지난 7월 출간된 『과학의 자리』(김영사)는 그러한 믿음과 실천의 종합판이라고 할 만한 저작이다. 김 교수는 “27년간 실험실 밖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쏟아 부은, 내가 과학자로서 한국사회에 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이라고 자평했다. 책은 크게 ‘근대 과학 이후 학문의 역사’를 다룬 전반부와 ‘과학 없는 한국사회’를 비판한 후반부로 나뉜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후 서구의 사상과 지식체계는 과학과 인문학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 진보해 왔는데, 한국은 이를 분절적으로 들여왔다. 인문학은 그 안에 내재된 과학의 흔적이 탈색된 채 수입돼 주류의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과학은 기술과 발전의 도구로 역할이 제한돼 공론장의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은 ‘과학기술은 있지만 과학은 없는 사회’가 됐다.

한국 사회에 ‘과학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인문학계와 과학계, 정치권력의 책임을 돌아보는 것이 이번 책의 실천적 목적이다. “책이 어렵더라”는 기자의 푸념에 김 교수는 “그건 내가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서양철학사는 한국의 철학전공자나 과학학 연구자들에게조차 생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편향적인 인문주의 전통에 매몰된 학자들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아무도 우리가 오해해온 서양사상사를 이야기하지 않기에, 과학자로 과학의 자리를 고민하고 공부해온 입장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집필취지를 설명했다. 세계를 바꿔내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힘이 과학에 있다고 믿는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김우재 교수는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해 포항공대에서 바이러스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중국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에서 초파리와 꿀벌의 사회성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 사진은 하얼빈공대 연구실에서의 모습. 사진=김우재
김우재 교수는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해 포항공대에서 바이러스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중국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에서 초파리와 꿀벌의 사회성 행동을 연구하고 있다. 사진은 하얼빈공대 연구실에서의 모습. 사진=김우재

 

△‘한국에는 과학의 자리가 없다, 한국사회에 과학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서 ‘스타 과학자나 베스트셀러 과학교양서는 있지만 노벨상은 없다’ 정도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 뜻이 아니다. ‘과학의 자리’가 없다는 말은, 과학이 경제발전의 도구나 노벨상을 목표로 지원돼 왔으나, 과학이 진정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즉, 과학적 발견이나 결과보다,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론과 과학자 사회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쌓아온 규범적 전통이 사회의 진보에 훨씬 더 도움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과학을 도구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코로나19로 드러난 사실은, 근대과학이 시작된 서구문명조차 과학을 그런 도구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과학의 자리는 한국뿐 아니라 과학을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사회에 필요하다는 게 내 주장의 요지다.”

 

△책의 핵심 논지는, 뉴턴 이후 과학뿐 아니라 학문 생태계 전반의 방법론이 바뀌어 버렸고, 이 영향력 아래서 철학사는 과학사 없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은 모든 학문지형에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뉴턴의 근대과학 성립 이후,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이 등장했고, 이 흐름은 서양 사상사의 모든 부분에 궤적을 남겼다. 우리가 문학가로만 알고 있는 볼테르가 뉴턴을 소개한 인물이라는 점이, 가장 상징적일 듯하다. 대문호라는 괴테조차 근대과학의 성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거부하기 위해 직접 과학을 공부하고 실험까지 수행했던 인물이다. 이 점을, 한국의 철학자들은 가르치지 않는다. 근대과학은 실험과 이론의 결합이라는 방법론 속에서 꾸준히 진보해 왔고, 이 과학적 방법론은 학문의 기준이 되었다. 뉴턴 이후 서양의 모든 학문은 바로 이 근대과학의 승리에 대한 반응(reaction)이다. 18세기 이후 서양철학자들의 저술을 읽어보라. 그들은 모두 과학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작업을 진행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러나 대학 철학 수업에서 철학 사상사의 한 축으로 과학사가 다뤄지는 경우는 잘 없었던 거 같다. 한국의 강단 인문학은 어쩌다 과학적 전통에 무지한 반쪽짜리 학문이 됐나.

“애초 서양에선 자연철학자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었고, 철학의 전통 속에 과학이 들어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뉴턴도 스스로를 과학자가 아니라 자연철학자라 부르던 인물이다. 한국 근대학문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보자. 우리에겐 그런 전통이 아예 없다. 일제 시대 이후 서구로 유학 갔던 한국의 인문학자들은 한국에 서양철학을 수입하면서도, 과학은 쏙 빼고 논의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한국에 수입되었고, 비엔나의 논리경험주의 전통은 아예 수입조차 되지 않았다. 과학철학이나 과학사 그리고 과학사회학 등의 전통이 한국에 들어오긴 했지만 비주류에 불과하다.

한국 강단 인문학자 중에서 과학자 출신이 단 한 명이라도 있나? 그들이 과학을 말 할 때면 항상 인용하는 토마스 쿤도 물리학자였고, 자유주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인 칼 포퍼는 과학철학이 전공인 사람이다. 비트겐슈타인도 비엔나 써클과 교류하며 논리경험주의 전통 속에서 과학을 고민한 인물인데다 기계공학자였고, 기호학의 아버지라고만 알려진 퍼스는 사실 화학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한국에 이런 인문학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나? 한국 강단 인문학계엔 인문학 순수주의자만 넘쳐날 뿐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세상에 순수인문학이라는 건 없다.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제외하면, 인문학은 현실에 기반한 그 어떤 논의와 상상력도 펼쳐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 강단 인문학은 점점 말도 안 되는 형이상학 아니면 도덕적 훈계나 들이미는 꼰대들의 학문이 되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왼쪽부터) 볼테르, 괴테, 퍼스, 비트겐슈타인. 이미지=위키피디아
(왼쪽부터) 볼테르, 괴테, 퍼스, 비트겐슈타인. 이미지=위키피디아

 

 

△'과학적 전통과 방법론에 이해가 없는 반쪽짜리 인문학'은 왜 문제인가.

“그 전통에서 교육받은 인물들이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법조인이 되고 정치인이 된다. 진중권, 윤석열, 이재명, 최재형, 홍준표 등 한국사회 뉴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인물들이 상당히 다른 것 같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과학적 태도를 무시하고 사회를 비합리적인 인문학에 기대어 이끌어가려는 인물들로 보일 뿐이다. 인문학 자체가 과학을 무시하고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인문학은 스스로 소멸되어 가면 그 뿐이니까. 진짜 문제는 그런 잘못된 인문학을 이념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이들이 나타날 때 생긴다. 한국사회의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라. 아마 최재형 후보처럼 다들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만 하게 될 거다.”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점점 세부 분과가 쪼개지고 전문화되는 현대 학문의 흐름상 통합적인 지식인상은 구조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에서 그런 지식인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 말기에도 실학이라는 전통이 나타난 적이 있다. ‘과학자냐 인문학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제 학문의 역사와 전통에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한국엔 과학을 모르는 인문학자가 많아서 문제인 게 아니라, 자신의 학문 전통조차 제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은 인문학자만 있어서 문제인 것이다. 인문학의 전통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한 학자라면, 과학의 자리를 지나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스티븐 제이 굴드, 존 버널 등을 언급하며 한국에는 이런 과학 지식인이 없다고 지적했다. 과학자와 과학지식인은 어떻게 다른가.

“책에서 언급한 인물들은 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성장했지만, 사회의 진보의 문제들에서 결코 뒷걸음치지 않았던 이들이다.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겪으면서 인문학자의 정체성을 지닌 시인, 철학자, 사상가들만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을 갖게 된 것 같다. 그 분들이 시대정신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저항했던 건 맞지만, 이제 그 시대적 한계도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손꼽히던 목수정 같은 작가가 백신음모론자로 변신하는 걸 보라. 미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법조인 등등이 한국사회의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버널, 르원틴, 벡위드, 굴드 같은 지식인들의 가치를 한국사회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을 나는 과학지식인이라고 부른다. 과학을 상아탑에서의 연구로만 협소하게 여기는 과학자들도 과학지식인이 될 수 없다. 과학과 사회와의 거리를 좁히고, 자신의 작업을 항상 사회적 맥락 속에서 고민하며, 사회에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 한국 사회엔 그런 과학지식인의 전통이 전무하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시리즈에 등장할 정도로 학문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과학자다. 김우재 교수는 그를 (한국에는 없는) '과학지식인'의 전범으로 꼽는다. 생물학자의 자리에서 우생학, 창조과학 등을 비판하며 사회문제에 개입했고, 진화론이나 무신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갑내기 라이벌 리처드 도킨스와 벌인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위키피디아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시리즈에 등장할 정도로 생물학뿐 아니라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과학자다. 김우재 교수는 그를 (한국에는 없는) '과학지식인'의 전범으로 꼽는다. 생물학자의 자리에서 우생학, 창조과학 등을 비판하며 사회문제에 개입했고, 진화론이나 무신론에 대한 입장 차이로 동갑내기 라이벌 리처드 도킨스와 벌인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위키피디아

 

△한국에서 과학은 성장을 위한 도구∙기술로 수입∙육성됐고 이는 과학자를 지식인이 아닌 기술자로 묶어 두게 된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막대한 규모의 과학기술 R&D 예산은 역설적으로 국가와 산업의 통제 아래 종속된 과학자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과학기술’에서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내는 일이 중요해 보이는데.

“과학과 기술을 분리하는 건 현대사회에선 불가능하다. 과학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둘은 아예 처음부터 분리된 적도 없다. 순수한 과학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현대사회에서 과학은 기술의 종속변수다. 실제로 호기심만 충족시키는 과학연구가 국민의 세금을 이용해 이루어진다면, 기초과학자인 나 또한 반대한다. 나는 기초과학 연구자이지만, 결코 기초과학만 지원해선 안된다고 주장해왔다.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과학기술 연구가 국가주도 연구개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런 과학기술개발은 언젠가 질적 도약과 혁신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초과학은 일종의 보험으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실제로 서구의 과학기술사를 봐도, 과학과 기술의 국가적 주도 이후 모든 정책은 이렇게 흘러왔고, 그런 국가들이 현재 세계의 과학기술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자 사회가 정치적 주체로 조직화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실천은 무엇인가?

“과총(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라는 어용조직을 털어내고 민간주도의 과학기술인협회를 만드는 거다. 간단하다.”

 

타운랩 프로젝트, “시민들이 과학을 ‘하게’ 하라”

 

△과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과학을 알게 하려면 과학을 하게 해야 한다. 그 방안으로 제안한 아이디어가 ‘타운랩’이다.

“타운랩은 누구나 과학자가 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어릴 때 누구나 피아노와 미술을 배우고 예술의 가치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타운랩은 과학의 가치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타운랩은 내가 과학자로 살면서 사회의 변화를 위해 만들어낸 대안이다. 타운랩이 실행되는 나라는 없다. 서구과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캐나다에 있을 때 타운랩 실험을 해봤고, 중국에서 자리가 잡혀 타운랩에 관심이 있는 투자자나 공기관이 나타난다면 언제든 해볼 생각이 있다. 타운랩은 내 평생 이루고 싶은 과학자로서의 꿈 중 하나다.”

 

김우재 교수가 캐나다 오타와에서 타운랩 실험을 하던 당시의 사진. 타운랩 프로젝트에 도움을 준 연구원, 학생과 함께 있다. 사진=김우재
김우재 교수가 캐나다 오타와에서 타운랩 실험을 하던 당시, 프로젝트에 도움을 준 연구원 파블로 아자테씨(왼쪽 끝), 학생 오하영씨(가운데)와 함께 있는 모습. 사진=김우재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미국, 일본과 서유럽 국가들, ‘과학 선진국’들은 치명적인 방역 실패와 혼란을 겪어야 했다. 반면 한국은 정치와 과학전문가, 시민의 협업이 월등하게 잘 이루어졌다. 책 마지막에 인용한 칼럼처럼, 소수 엘리트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된 사회보다 다수 시민이 과학적 상식의 합리성을 체화한 사회가 더 나은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한국의 ‘문화로서 과학’과 ‘과학 지식인’을 재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위기를 기점으로 등장한 그 과학지식인들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으려면, 다른 영역이 이들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한국에서 코로나19가 끝나면 이들도 금방 잊혀질 것이라는 점이다. 과학이 필요한 문제는 사회에 널려 있다.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고 싸우는 과학자들이 더 많아지는 게, 과학지식인이 한국사회를 이끄는 주체로 서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엔 싸우는 과학자보다 연예인 병에 걸린 과학자가 더 많고, 그런 대중과학자들이 시민들에게 과학자의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대선 레이스로 연일 뉴스 헤드라인이 떠들썩하다. 대부분의 정책이 잘 보도되지 않고 있지만 과학 정책에 대한 논쟁은 더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정책 논쟁은 대통령이 선출되는 날까지 전혀 다뤄지지 않을 거다. 한국 정치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자.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이들의 출마선언문을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과학기술에 도구적으로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과학기술정책 패러다임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강력한 이념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과학적 태도의 마지막 보루 노릇을 할 국가기관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치인들은 팬데믹을 거치며 한국사회가 보여준 징후들에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 국민들은 정부의 방역을 대부분 충실히 따랐지만, 백신에 대한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언론에 의해 백신접종이 흔들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거대정당의 정치인들이 언제든 도널드 트럼프처럼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또 선동할 수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다. 일부 종교의 광신자들은 정부의 과학적 방역지침을 거부하고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노동운동조직조차 집단의 이익을 위해 대규모 집회를 강행하는 등, 한국사회의 약한 고리가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은, 한국사회가 과학적 삶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록에 쓴 인권위원회와 비슷한 구조의 ‘과학적사회위원회’도 그런 대안의 일부다. 과학적으로 분명한 사안에 대해 비과학적 이념과 선동이 난무할 때, 정부는 분명히 대응해야 한다. 한국엔 그런 조직이 없다. 인권위원회가 인권의 마지막 보루이듯, 과학적사회위원회 또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과학적 태도를 유지하는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다. 코로나19는 왜 우리에게 그런 조직이 필요한지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에필로그를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독서편력과 자신만의 사상사를 정리해 이해하고 현재의 생각과 태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역산하는 작업은 모든 공부하는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의 자리’를 접할 독자들에게 심화학습을 위해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이음, 2018)라는 책이 있다.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의 책인데, 어려운 책이지만 내가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학자들도 사회에 민주주의가 기능하려면 과학지식인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과학지식인을 부엉이라고 부르더라. 목을 180도 돌릴 수 있는 부엉이처럼 인문학과 과학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은 과학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사회문제에 접근하는 과학지식인 밖에 없다는 거다. 게리 워스키가 쓴 두 권의 책 『과학……좌파』(이매진, 2014)와 『과학과 사회주의』(한국문화사, 2016)도 번역되어 있다. 20세기 영국에서 활동했던 버널, 홀데인, 니덤 등의 과학지식인들의 이야기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큰 교훈을 줄 수 있을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과학의 자리』 외에도 아직 김영사와 계약한 3~4권의 책이 남아 있다. 그 책들을 천천히 정리할 생각이다. 2008년부터 3년간 연재했던 RNA 발견의 역사를 다룬 『꿈의 분자』라는 책이 내년에 출판된다. 최근 코로나19 mRNA백신이 세상을 구했으니, 10년이 넘은 이 글도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싶다. 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이 될 텐데, 박사과정에서 연구했던 RNA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 방식으로 정리한 책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안 팔리겠지만.

<동아사이언스>에 기고 중인 ‘보통과학자’라는 연재도 언젠가는 책으로 묶어 낼 생각이다. 과학자의 99%는 노벨상을 타지 못하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하는 사람들인데, 과학사는 영웅들의 이야기만 담고 있다. 양극화는 사실 과학계에서 가장 심각하다. 보통과학자는 과학자라는 직업의 현실과 의미를 진지하게 다루는 책이 될 거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허락한다면, 죽기 전에 『실험생물학의 철학』이라는 책을 쓰고 싶다. 실험생물학자로 살아온 경험과 공부가 가리키는 방향은 그 책이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책보다 연구가 우선이다. 연구하고 논문 쓰고 제자들 가르치는 일이 내 직업이다.”

 

△과학을 할 때(실험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초파리 연구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고 했다. 그 행복과 재미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

“과학실험실에서 발견의 희열을 느껴보지 못한 분들에게 그걸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에서 느끼는 희열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희열을 알고 싶다면, 나중에 만들 타운랩에 참여하면 된다.”

 

김우재 교수가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의 실험실 구성원과 함께 있는 모습. 사진=김우재
김우재 교수가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의 실험실 구성원과 함께 있는 모습. 사진=김우재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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