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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5] 이상의 초현실주의는 혁명이 아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5] 이상의 초현실주의는 혁명이 아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8.1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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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브르통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였을까? 이상의 시를 처음으로 읽은 것이. 당시 국어교사가 「오감도」를 설명하면서 이상(1910~1937)을 초현실주의 천재라고 역설한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가 왜 그런 천재인지를 모른다. 그 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어린 나의 질문에 교사는 초현실의 천재만이 아는 것이라며 시험에 나오니 무조건 외우라고 닦달했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제일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가…”로 반복되는 그 시를 외울 수 있다. 소위 국정교과서와 시험의 무지막지한 횡포의 하나였다. 당시 국민교육헌장을 비롯해 정말 많은 것을 외웠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나에게 무익했다. 소위 천재라는 자의 난해함이라는 유행과 그것이 시험에 나오는 것에 대한 공포 외에 무엇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초현실주의는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주문 같은 것이었을까? 현실에 눈감기 위한 가림막 같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초현실주의는 다다처럼 절대자유를 추구하여 초현실, 즉 현실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인간해방운동과 연결된다. '초현실주의의 교황'이라고 불린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은 1924년의 첫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자유는 내가 여전히 높이 평가하는 유일한 단어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초현실주의가 처음 자신을 인식한 것은 아나키즘이라는 검은 거울 속에서였다"라고 했다. 권위와 종교에 대한 극심한 증오를 가진 급진적인 예술 운동인 초현실주의는 아나키즘의 자연스러운 동맹군이었다. 실제로 초현실주의에 대한 선구자이자 영향인 다다의 예술 운동은 1916년 취리히에서 세계 대전의 야만과 학살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다. 브르통은 1919년에 만난 다다 시인 자크 바세(Jacques Vache, 1895~1919)의 영향을 받았다. 브르통은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거부는 완벽했다. (중략)…현대 세계가 자리 잡고 있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그 가치를 보여준 모든 제도는 우리에게 일탈적이고 추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선 우리가 공격하고 있는 것은 군대, '정의', 경찰, 종교, 정신의학과 법의학, 학교 등 사회의 전체 방어 장치였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

 

혁명은 권위도, 제약도, 사소한 계명의 흔적도 없는 개인 자유를 보장해야

 

초현실주의자들은 1923년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악숑 프랑세즈(L' Action Francaise)’의 활동가이자 기관지 편집인이며 왕당파인 자를 살해하고 배심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젊은 아나키스트이자 노동조합원인 여성 제르맹 버튼(Germaine Berton, 1902~1942)과 연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녀는 곧 초현실주의자들의 뮤즈이자 혁명의 화산으로 떠올랐다.

당시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대부분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혁명(La Revolution Surrealiste)>의 편집장을 지내면서 ‘감옥을 열어라’나 ‘군대를 해체하라!’와 같은 아나키즘 글을 썼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또한 1933년 자신의 아버지를 독살한 젊은 여성 비올레트 노지에르(Violette Noziere, 1915~1966)를 변호했다. 비올레트는 그녀의 아버지가 12세부터 주기적으로 그녀를 강간했다고 비난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 재판을 통해 부르주아 가족과 부르주아적 위선을 비난했다. 프랑스 현대 언론에 처음으로 등장한 근친상간 사건 중 하나인 이 사건은 1978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1923년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악숑 프랑세즈(L' Action Francaise)’의 활동가이자 기관지 편집인이며 왕당파인 자를 살해하고 배심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젊은 아나키스트이자 노동조합원인 여성 제르맹 버튼(Germaine Berton, 1902~1942).
1923년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악숑 프랑세즈(L' Action Francaise)’의 활동가이자 기관지 편집인이며 왕당파인 자를 살해하고 배심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젊은 아나키스트이자 노동조합원인 여성 제르맹 버튼(Germaine Berton, 1902~1942).
'초현실주의 혁명(La Revolution Surrealiste)'.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12번에 걸쳐 프랑스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발행한 간행물.
'초현실주의 혁명(La Revolution Surrealiste)'. 1924년부터 1929년 사이 12번에 걸쳐 프랑스 파리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발행한 간행물.

 

 

1927년 1월 브르통과 함께,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1895~1952)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이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중 아라공은 “초현실주의 그룹의 가장 아나키즘적 정신”에서 러시아 비밀경찰 NKVD를 기리는 시를 쓴 끔찍한 스탈린주의 핵심으로 변모했지만, 브르통은 공산주의 프로그램을 최소한의 프로그램으로 보고 당 보고서를 “분명히 쓸데없이 선언적이며 독설적이며 읽을 수 없다. 그것이 가정하려는 프롤레타리아 교육의 역할에 완전히 합당하지 않다”고 비판했고 공산당에 가입한 다른 초현실주의자들도 모스크바의 쇼 재판에 대해 분명히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노동자 혁명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신의 특정한 선입견을 지키면서 공산당 지도부의 엄격한 고삐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며 참여하는 폭풍우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결국 브르통은 1933년에 공산당에서 추방되었고, 당이 통제하는 ‘문화 수호를 위한 국제회의’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비난을 받았다.

초현실주의자들 중 일부는 트로츠키주의 및 반볼셰비즘과 동맹을 맺었다. 브르통은 1938년에 멕시코대학교에서 유럽의 시와 회화에 관한 일련의 회의를 주최하면서 당시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와 접촉했다. 트로츠키와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그는 「독립 혁명 예술을 위하여」이라는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 안에 “혁명은 중심 계획을 가진 사회주의 정권을 세워야 할 의무가 있다. 지적 창조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지적 자유의 아나키즘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제약이 없고 명령도 없다”, “혁명은 처음부터 문화 창조를 위한 개인 자유의 아나키즘 체제를 확립하고 보장해야 한다. 권위도, 제약도 없고, 사소한 계명의 흔적도 없어야 한다. 이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과 손을 잡고 행진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브르통의 뿌리는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

 

브르통은 1947년에 쓴 『아르카움 17(Arcanum 17)』에서 그가 어렸을 때 묘지에서 '신도 주인도 없다'라는 간단한 비문이 새겨진 비석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예술과 시 위에는 빨간색(사회주의)과 검정색(아나키즘)을 번갈아 가는 깃발이 휘날린다"라고 하면서 두 가지 색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기를 거부했다.

브르통의 아나키즘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반발한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특정한 문화적 형태에 매료되고 현대 산업 문명의 차갑고 추상적인 합리성을 거부하면서 그 향수를 혁명적 변혁을 위한 전투에서 힘으로 바꾸는 사상의 한 형태를 의미했다. 현대의 모든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관계의 정량화, 상업화 및 구체화의 논리적이고 필요한 결과인 세계의 자본주의적 반감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상상을 통해 세상을 다시 매혹시키려는 욕구를 발견한 것은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자들을 통해서였다. 브르통의 마르크스주의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헤겔 변증법적 유산을 주장하여 프랑스 공산주의의 공식 교리를 지배한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으로 강력하게 표시된 과학적 합리주의나 데카르트적 실증주의 경향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1896~1966)

 

브르통은 스페인내전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엘뤼아르는 인민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특히 페레(Benjamin Péret, 1899~1959)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28~1959)처럼 반스탈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POUM의 라디오 방송에서 일했지만 그 조직이 카탈루냐 정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떠나 아라곤 전선의 아나키스트 부대에 합류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제2차 대전이 시작될 때 징집 아나키스트 전단지 배포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감 후 멕시코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트로츠키주의를 철저히 비판했고 그 조직과 거리를 두었다.

제2차대전 후 초현실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연합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1951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르 리버테르(Le Libertaire)>지에 정기적인 주간 칼럼을 쓰면서 노동조합을 반혁명적 조직으로 규정하고 대안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자주관리기구인 노동자평의회를 제시했는데 이는 아나키스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나 브르통은 아나키스트연합과 계속 연대했다. 그는 알제리 전쟁 동안 아나키스트들이 심각한 탄압을 받고 지하로 숨어들었을 때에도 그들을 지원한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도 죽을 때까지 반파시스트위원회에서 일했다. 이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와 연대하면서 그들 이상으로 자유를 위해 싸웠다.

 

이상(1910~1937
이상(1910~1937)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상과 같은 초현실주의 천재들이 개인이나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우리나라의 이상 연구자들은 근대성이 가져오는 모순을 치열하게 비판했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적어도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삶과는 상당히 달랐다. 일제강점기에는 프랑스 이상으로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이상은 그런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에서 시와 예술은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즘이지만 이상에게는 그런 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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