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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의 디자이너
작가로서의 디자이너
  • 조현신 국민대 교수
  • 승인 2021.08.25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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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파노라마 9

건축가 미즈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는 “Less is more(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라는 명제로 모던 디자인의 원리와 미감을 규정했다. 시각 디자인에 이를 적용하면 간결하고 뚜렷한 시각요소를 통해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집이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는 이를 뒤집어 “Less is bore(적을수록 지루하다)”라는 말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감을 설명하고 있다. 

모든 시각성은 당연히 당대 의식과 미감의 반영이다. 재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서구 사회가 추구하던 모던 프로젝트에 참담한 실패감을 안겼고, 이어서 68청년 혁명 등을 통해서 기존 가치관에 대한 저항과 붕괴가 진행되면서,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디자인계에서는 이 시기 안티 디자인 운동이 일어나, 건축을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문화적 조류와 함께 시각 디자인에서는 특히 컴퓨터의 디지털 그래픽은 그간의 인쇄물이 보여주던 시각 질서에서의 과감한 탈피가 진행되었다. “적을수록 지루하다”는 명제는 그리드의 실종, 토속성과 현대성의 혼성, 장난 같은 패러디, 모호한 양가성 등을 병치시켜 메시지 자체가 모호한 결과물을 산출하는 디자인 양식으로 귀결되었다. 무얼 이야기하는지 모르게, 혼잡하게 뒤범벅된 지면은 모던 디자인이 추구하던 거대 담론이 무너진 이후, 미래를 상실한 주체들의 무의식적 지표였을 것이다.

에이프릴 그레이만이 그린 자화상. 당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던 페미니즘적 내용과 더불어 디지털 테크닉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에이프릴 그레이만이 그린 자화상. 당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던 페미니즘적 내용과 더불어 디지털 테크닉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레이만, 합목적적인 디자인에서 탈피하다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에이프릴 그레이만(April Greyman)의 자화상을 보자. 그녀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인 볼프강 바인가르트 밑에서 배운 뒤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당시 등장하던 컴퓨터그래픽 기법을 빌려 작품을 시작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1984년 LA 올림픽 포스터는 시각적 환각을 불러일으킨 수작으로 꼽힌다. 과감한 컷팅, 낙서, 사진과 그래픽적 요소의 결합 등이 과거의 합목적적인 디자인과는 다른 미감을 보여준다. 1986년에 제작된 그녀의 자화상에는 눈을 부릅뜬 현실의 경쟁을 직시하는 여성과 꿈꾸는 여성이 공존하며, 전면을 채운 그녀의 등신(等身) 크기 나체 이미지 위에는 멀리 우주적 연대기와 과학 기호가 공존한다. 설명에는 “무슨뜻인지 아는가?”라고 쓰여져 있다. 이 포스터는 당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던 페미니즘적 내용과 더불어 디지털 테크닉을 선구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레이만이 디자인한 1984년 LA 올림픽 포스터. 시각적 환각을 불러일으킨 수작으로 꼽힌다.
그레이만이 디자인한 1984년 LA 올림픽 포스터. 시각적 환각을 불러일으킨 수작으로 꼽힌다.

 

'IBM 로고'로 보는 포스트모던의 미감

타이포그라피에서 잠깐 포스터모던적 미감을 보자. 모던 시대의 미학을 정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IBM 로고는 폴 랜드(Paul Land)가 디자인한 것인데, 그는 “변화와 기본의 관계를 신중히 저울질해야 우수한 로고가 나온다”라는 뚜렷한 작품을 제시하면서 주사선을 넣은 로고를 제시해 신선한 미감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역시 포스트모던 조류가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인 1981년에는 눈과 벌을 이용한 상징적인 로고를 제시하면서, 장난기, 다의적 해석 등을 인정했다. 한편 디자인을 배우지 않는 에드워드 펠라(Edward Fella)는 그야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 기능성과 합목적성을 탈피한 직관적이고 유희적인 글자를 선보여 안티 프로페셔널리즘 타이포그라피를 선보인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작가로 평가된다.

폴 랜드가 디자인한 IBM 로고. 모던 시대의 미학을 정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폴 랜드가 디자인한 IBM 로고. 모던 시대의 미학을 정통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폴 랜드는 포스트모던 조류가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인 1981년에 IBM의 새로운 로고를 선보인다. 눈과 벌을 이용한 상징적인 로고를 제시하면서, 장난기, 다의적 해석 등을 인정했다.
폴 랜드는 포스트모던 조류가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기인 1981년에 IBM의 새로운 로고를 선보인다. 눈과 벌을 이용한 상징적인 로고를 제시하면서, 장난기, 다의적 해석 등을 인정했다.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는 에드워드 펠라는 기능성과 합목적성을 탈피한 직관적이고 유희적인 글자를 선보였다.
디자인을 배운 적이 없는 에드워드 펠라는 기능성과 합목적성을 탈피한 직관적이고 유희적인 글자를 선보였다.

그는 “디자인에서의 룰이란 깨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정교한 저울질의 법칙을 언제나 깨는 디자인을 보이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는 자신의 몸 위에 글자를 새긴다거나(암각화에 글자를 새기던 행위에서, 자기 몸에 피를 흘리며 글자를 새기는 모습까지의 변화, 무언가 포스트모던적 비애감이 느껴지는 행위인 듯하다) 숙성도가 다른 바나나를 이용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글자를 보이는 등 시각형식 제공자로서의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철학을 담은 시각물들을 적극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메시지를 가공하는 시각디자이너의 역할을 넘어, 메시지 해석과 생성에 간섭하는 작가로서의 디자인이 탄생한 것도 역시 포스트모던 시대의 결과였다. 

편집 자체가 모호하고 파편적인 모양새를 보인다면, 이 틈새로 디자이너가 텍스트의 생성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듯도 하다. 서울대 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의 일부를 디자인한 건축가 렘 쿨하스의 카다로그 「S,M,L,XL」(스몰, 미디엄, 라지, 엑스라지, 1996년)는 캐나다 디자이너 부루스 모(Bruce Mau)가 디자인한 것으로 해석가, 의미 생성자로서의 디자이너의 풍취를 마음껏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물에서 크기는 상관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1천334쪽의 방대한 이 책의 어떤 한 면에서도 얌전하게 놓인 건축물 사진을 볼 수 없다. 잘리고, 망점 처리되고, 확대되고, 축소된 사진들과 도면, 텍스트만이 들어온다. 이를 “지면의 영화적 전개”라고 평하는 비평가도 있다. 책의 전 페이지는 그가 대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지시하지만, 독자들로서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야 알 수 있는 책이다. 그해의 Best 10 작품으로 선정된 이 책이 나오고 난 후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거의 모든 전문 건축 카탈로그는 이런 편집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1999년 TTL 광고. 상징적인 오브제들의 등장과 함께 해석할 수 없는 광고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1999년 TTL 광고. 상징적인 오브제들의 등장과 함께 해석할 수 없는 광고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포스트 모던적 어법의 시각디자인은 어리둥절하며, 낯선 인상을 풍기면서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도입되었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 디자인적 미감을 대중적으로 제일 먼저 선보인 대중적 시각디자인으로는 TTL 광고를 들 수 있다. 1999년 중성적 매력을 풍기는 소녀가 물에 젖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다른 카피없이, “너 행복하니”, “비가 내린다” 등으로 등장한 이 광고는 어항, 우주인 등 상징적인 오브제들의 등장과 함께 해석할 수 없는 광고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모던이냐 포스트 모던이냐는 이제 더 이상 논제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역사로 편입되었다. 특히 타이포그라피는 코딩에 의해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변형되는 컴퓨터 상의 글자체, 개인 서체로 이동하고 있다. 자신의 몸에 익힌 기운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하여, 인격적 판단의 기준으로까지 쓰여진 글자체가 이제는 시각적 차별성과 미감만을 요구하고 있다. 손글씨는 전통기 말미 서예를 배우던 것처럼 취미나 여가의 수단이 되고 있으며, 인쇄를 기반으로 하던 글자 디자인 역시 그 뒷자락을 보인다. 광고는 전문성보다는 평범한 일상의 체험만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며, 편집 디자인 역시 이제는 AI가 담당하면서 개인 맞춤형으로 전개되는 중이다. 전통기까지 시각 디자인의 기본 원리는 상징적 질서 구현, 전례 답습이었고, 근대기에는 기계미학, 합리적 기능미학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정보 전달 디자인에서는 비기능화, 예술화, 작품화 등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AI가 등장하면서 쌍방향, 이야기, 일상성, 경험 등과 결합하면서 체험과 경험의 시각디자인으로 이동 중이다.

 

조현신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디자인물에 관심이 많다. 특히 한국의 근대기 시각디자인문화사를 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대표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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