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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6] “철학을 통해 나는 내 안에서 아나키스트를 발견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6] “철학을 통해 나는 내 안에서 아나키스트를 발견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8.2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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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2021년 초에 나온 <마니에르 드 부아르>에는 프랑스 사회가 획일, 편협, 인습 등의 순응주의에 젖어 참여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사르트르를 철저히 거부한다는 글이 실렸다. 프랑스보다 훨씬 순응적인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는 제대로 연구되지도 못하고 읽혀지지도 않는다. 연구된다고 해도 너무 전문적이고 난해해서 읽기가 쉽지 않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국내에 나온 사르트르 관련 논저를 찾아보았는데 내가 그를 아나키스트로 이해하는 점과 관련된 것은 내가 쓴 『카페의 아나키스트, 장 폴 사르트르』뿐이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실존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내가 처음 알았던 ‘주의’는 ‘때려잡아야 하는' 공산주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를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알았다. 그때 ‘주의’라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중학교에 들어와서 실존주의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주의 중에도 좋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얹혀 산 친척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그 집 대학생이 산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6~1900)의 『운명의 별이 빛난 때』라는 책이 유일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번역인 그 책에서 실존주의라는 말을 처음 읽었던 나는 지금까지도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어떤 주의의 이름이 이렇게 난해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실존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낯설다. 합리주의니 공리주의니 실용주의니 하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존주의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것이 ‘현실적 존재’(existentia)의 준말이자 ‘본질적 존재’(essentia)의 반대말로서, 객체성이 아닌 주체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상식을 알게 된 것은 내가 한참 철이 들고난 뒤였다. 그 두 개념을 각각 존재와 본질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들이 현실에 ‘존재’하기 전에 신에 의해 먼저 그 ‘본질’(영혼)이 결정되었다고 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본질이 존재에 앞서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그러나 사르트르는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본질은 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면서 그것이 인간이 놓인 상황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행동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만들어가는 자각적 존재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따라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한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으로, 이러한 기존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다'고 하는 무한의 자기초극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참된 본래의 자기가 되려고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의 온갖 주의 주장의 추상적 관념이나, 우리를 둘러싼 온갖 객관적 제도, 특히 대중문화로 인해 상실된 개성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다.

 

한국의 실존주의 수입상은 유신체제 부역자

 

그런데 실존주의에 대한 책들은 그것이 시대를 거역하게 살라는 반항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철학자들이 없다. 도대체 그렇게 살거나 말할 자신도 없으면서 왜 실존주의 같은 반시대의 서양철학을 소개하는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박정희 유신체제 확립에 기여한 박종홍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실존주의를 소개한 서울대학교의 철학교수였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권력을 잡았을 때 역시 어용교수로 활약한 이규호도 반자본주의자인 에리히 프롬을 소개한 철학자였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교수라는 자들이 이렇게 이중으로 사는 곳이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을 한동안 떨쳐 버리지 못했다.

1960년대는 소위 근대화, 서양화, 과학화, 산업화, 군사화, 국민국가화 등이 본격적으로 국가에 의해 강요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대변화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우리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양의 근대, 즉 과학과 산업과 군사가 본격화된 19세기 서양의 물질주의를 모방하자는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이미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런 19세기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이 생겨났고, 그 중의 하나가 실존주의였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즉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적 존재에 대응하는,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현실존재의 우월을 본래성으로 주장하거나, 우월하게 된 현실 세계를 긍정하여 그것과의 관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사르트르가 창간한 '현대' 1966년 1월1일자.
사르트르가 창간한 '현대' 1966년 1월1일자.

 

장 폴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한 살 무렵에 아버지가 죽어 열 살까지 엄격한 외조부 밑에서 자라면서 외가의 낯설음과 선천적 근시 및 사시(斜視) 등으로 심리적으로 아픔을 느꼈으나 외조부의 깊은 교양은 사르트르의 학문적 탐구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1915년부터 명문 중고교에 다녔으나 어머니의 돈을 훔쳐 조부에게 혼이 나고 소녀를 유혹하려다 실패하여 자신의 추한 생김새를 자각하기도 했다. 그러한 성장과정은 그에게 실존을 의식하게 했을 것이다. 1923년에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공부하고 1928년 교사자격시험에 낙제한 뒤 이듬해 합격하고 1929년부터 시몬 드 보봐르와 계약결혼은 한 것도 실존의식과 연결될 수 있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쓴 소설 『구토』(1938)는 현실에 대한 반항으로서 구토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제2차대전이 터지자 소집되었으나 1940년 포로로 잡혔다가 허위의 장애증명서에 의해 석방된 뒤 1943년에 『존재와 무』를 발표하고 1945년에는 <현대>지를 창간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1952년 카뮈가 자신의 『반항인』을 프랑시스 장송이 비판한 것에 항의하자, 「카뮈에 답한다」를 써서 카뮈-사르트르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뒤 구조주의가 대두하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주체 편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고, 알제리 독립 후에는 쿠바를 지지했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았으나 소련측 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고 소련의 1956년 헝가리 침입과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한 군사개입을 비판하고 반스탈린주의인 모택동주의자들이 주도한 학생운동을 지지했다. 또 1967년에는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비판하였다.

 

알베르 카뮈(1913~1960)
알베르 카뮈(1913~1960)

 

작가를 제도화하고 자유를 잃게 하는 명예를 거부한다

 

1964년에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으나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신성시되길 원치 않는다"라고 하며 수상을 거부했다. 1945년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를, 또 프랑스 지성의 최고영광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기도 하면서 그는 그런 영광들은 작가를 제도화 시키며 그의 자유를 잃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키는 지식인의 정신을 상징한 그는 1973년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창간했으나 두 눈을 실명 당하는 고통을 겪었고 1980년 사망했다.

 

'리베라시옹' 제호.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제호.

 

실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인적 아나키스트인 슈티르너와 니체는 실존주의의 선구자로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아나키즘과 실존주의의 의 밀접한 연결 고리다.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둘 사이에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으며 둘 다 마르크스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는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그의 지적 삶 전체를 바친 사르트르였다. 『실존주의와 휴머니즘』(1946)에서 그는 지울 수 없는 자유의 본질을 강조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도덕적 가치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이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본질보다 앞 선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고, 인간은 자유이다.” 인류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강력한 전망을 제공하면서, 사르트르는 자유의 경험은 기쁨이 아니라 고뇌의 하나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유로 비난 받는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

 

게다가 그가 그의 연극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인간 사이에는 자연적인 연대가 없다. '타인은 지옥이다.' 전쟁 후 사르트르는 스탈린주의 프랑스 공산당과 협력하고 1960년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조건화를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를 요구한 사르트르는 아나키즘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켰지만, 1968년 학생들의 반란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들보다는 마오주의자들과 연결되었다. 그는 콩방디트(Cohn-Bendit)가 아니라 체 게바라(Che Guevara)가 그 나이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생애가 끝날 무렵 사르트르는 아나키즘에 대한 자신의 친밀감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현대의 후손이 아닌 고전적인 아나키즘과 관련되었다. 그는 1975년에 “철학을 통해 나는 내 안에서 아나키스트를 발견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아나키 상태는 더 이상 1890년의 아나키 상태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유를 향한 길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적 관심으로 완화되었지만 아나키즘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속에 남아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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