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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국 싱가포르의 마이웨이 외교
강소국 싱가포르의 마이웨이 외교
  • 배기현
  • 승인 2021.09.16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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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 배기현 서강대 동아연구소 부교수
미중간 패권 경쟁이 국제질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현 시점에서 이웃 강소국 싱가포르의 외교양식을 참고할 만하다. 사진은 싱가포르 도심 파노라마 모습이다. 사진=위키미디어

국제정치이론가들은 강대국간 세력 분포에 따라 작은 나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해왔다. 실제로도 작은 나라들은 의도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거나, 강대국 정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외교 에너지를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국가나 테러리즘과 연계된 사건을 제외한다면, 우리들이 미디어에서 보는 글로벌 뉴스의 대부분이 미국과 중국, 일본에 관한 것이라는 점 역시도 이러한 구조적 시각을 강화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정학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외교에서 수동적이거나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빌비어 싱(Bilveer Singh) 교수의 말처럼, 이 나라는 전략적, 경제적으로 더 자율적인 공간을 마련하여 본원적인 취약성을 극복하는 행동주의의 모범을 보인다. 

이러한 목표는 싱가포르의 외교 양식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소수의 강대국 외교관계에 공을 들이는 데에서 더 나아가, 외교관의 수적인 열세와 무관하게 글로벌 플랫폼에서 스마트한 외교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이 건설되면서 아시아에서도 다자주의가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싱가포르는 아시아와 여기에 참가하지 않은 유럽 사이의 정상급 회의체를 별도로 추진하여 APEC 성장 과정에서 유럽이 느꼈을지 모를 상대적인 소외감을 상쇄시키고자 했다. 이게 바로 지금의 ASEM(아시아 유럽 정상회의)이다. 

또한 미국의 리더십에 대한 불안감과 중국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던 1990년대 초반, 싱가포르는 캐나다와 유럽과 함께 ASEAN 지역의 다자안보 협의체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나라이기도 하다. 당시 ASEAN 단위에서 안보 문제를 협의하는 것에 탐탁지 않아 했던 다른 회원국들에게 이 아이디어를 내부에서 설득하는 어려운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 노력은 현재 ARF(아세안 안보 포럼)로 성장하였고, ARF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회원수가 많고 오래된 다자안보 협의체의 하나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지역이나 이념과 상관없이 소국들이 모여 ‘전략적 무게’를 키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목표로 1992년 설계된 ‘작은 나라들의 포럼(Forum of Small States)’도 싱가포르 외교관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는 여전히 이 협의체를 주도하며 소국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유지한다. 한국이나 멕시코가 OECD에 가입해 국제사회에서 격상된 지위를 자축할 때, 싱가포르는 불참을 선택했다. 선진국의 명성이나 지위보다, 작은 나라로서 얻을 수 있는 실리가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소국 정체성은 고립된 국가를 국제사회로 끌어내고 약자의 목소리를 앞으로 끌어내는 역할에 대한 국가적 관심으로 연결되곤 했다. 특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싱가포르 외교는 2018년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싱가포르는 식민 경험이 있던 약소국들이 냉전 당시 어느 진영에도 매몰되지 않고자 만들었던 비동맹운동과 G77에도 50년 동안 참가해왔다. 오랫동안 어느 한쪽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나라와 협력하겠다는 외교를 표방해왔기 때문에, 북미 회담의 허브 역할이 어색하지 않다.

특히 전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시장경제를 운영하면서 정치적으로 일당 권력을 유지하는 싱가포르의 노하우는 동남아 구공산권 국가들이나 북한 지도자들에게 매력적인 모델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ARF는 남북이 함께 가입해있는 유일한 다자안보협의체라는 상징성을 얻게 되었는데, 북한이 가입하던 2000년 그 해의 의장국 역시 싱가포르였다. 북한 가입이 확정, 선포되는 여정에서 당해 의장국 싱가포르의 지지와 역할은 중요했다는 평가가 다수다.   

뿐만 아니라, 효율과 실용을 중시하는 외교가의 문화 덕분에 싱가포르 정부는 기수보다는 능력으로 외교 수장을 선발하고 조직 외부의 인재 등용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대 젊은 외교관이 대사 업무를 수행하거나 경제협상단을 이끄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결과와 실리를 중시하는 서구 비즈니스에 이질감이 적은 만큼, WTO나 UN 등 서구 주도의 외교 공동체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마찰이나 비용을 줄였다는 점도 싱가포르에게 외교 강국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해주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질서와 외교의 향방을 논할 때, 우리는 줄곧 미국과 중국, 일본 외교에 눈을 먼저 돌리곤 했다. 그러나 기민한 對강대국 정책뿐 아니라 선제적인 글로벌 외교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지정학적 조건이 너무 다른 주변 강대국들은 우리 외교에 적절한 모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작은 나라로서의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어떻게 외교를 혁신하고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는지 신중히 관찰해 볼만 만하다. 더군다나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질서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현 시점에서, 이웃 강소국 싱가포르의 외교 양식에 대한 공부는 우리의 외교 방향에 대한 성찰에 자양분을 제공하리라 본다. 

배기현 서강대 동아연구소 부교수
토론토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아세안(ASEAN)의 제도적 변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아세안의 규범적 변화, 통합 과정 및 동남아시아 국제관계, 한-ASEAN 관계 등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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