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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8] 알제리 문제에 침묵했던 아나키스트, 카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8] 알제리 문제에 침묵했던 아나키스트, 카뮈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9.27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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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②

1940년대에 대구에서 코로나 같은 전염병이 퍼졌다고 해보자. 그리고 일본인 의사나 일본인들만이 일본인 환자를 치료했다고 하자. 2020년 대구 환자들 대부분이 신천지 교도였듯이 일본인들만 병에 걸렸다고 하자. 그런 가정이야 기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유독 조선인들만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황당해도 너무 황당할 수 있다. 그러니 조선인들도 병에 걸렸고 위생이 좋지 못한 빈민가에 살아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는데, 일본인 순서에 밀려 아예 치료도 못 받고 그냥 죽어갔다는 것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사실 일제강점기에 그런 전염병은 여러 차례 있었다.    

알베르 카뮈(1913~1960)
알베르 카뮈(1913~1960)

코로나 19와 함께 카뮈의 『페스트』에 대한 이야기들이 별안간 요란스럽게 흘러나오기 전부터 나는 1940년대 알제리 오랑을 배경으로 한 그 소설에 왜 알제리 사람은 한 사람도 안 나오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주민의 대다수였던 그들은 페스트와 무관하고 그곳의 프랑스 사람들만 페스트에 걸렸단 말인가? 아니면 알제리 사람들은 페스트에 걸려 프랑스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는커녕 진찰조차 받지 못하고 그냥 죽어갔다는 것일까? 프랑스 사람인 카뮈에게는 그런 알제리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에 소설에 아예 등장시키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알제리 독립에 반대한 카뮈

누구는 그 소설이 『이방인』을 비롯한 카뮈의 다른 작품들처럼, 그 배경인 알제리와는 무관하게 제2차대전 때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인들의 저항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독일군이 페스트이고 오랑의 프랑스인들은 비시 정권하의 프랑스인이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처럼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야 자유겠지만, 최근의 요란스러움은 그 소설이 코로나19를 예언한 것인 양하는 호들갑에서 나오고 있으니 전염병 소설이라고 하자. 

평소에 카뮈를 그렇게 좋게 보지 않은 탓인지 최근 다시 읽어보아도 코로나19의 현실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나에게는 그 호들갑이 너무 불편하다. 최근 『이방인』에 대한 되쓰기가 있었듯이 『페스트』를 되쓴다면 프랑스 식민주의를 페스트로 하고, 그 밑에서 수십 년 착취당한 알제리인들의 저항을 중심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해 그런 시도를 해본 적도 있다. 마치 1918년에 조선인 14만 명이 스페인독감으로 죽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당시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그나마 치료를 제대로 받았지만 조선인들은 그렇지 못해 엄청난 희생자가 생긴 이야기를 식민지 상황과 결부해 쓰듯이 말이다.

'카뮈를 위한 변명'(2003)
'카뮈를 위한 변명'(2003)

나는 프랑스가 132년간이나 알제리를 지배한 식민주의를 카뮈가 제대로 그 문학에 반영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책을 2003년에 쓴 적이 있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인 학회에 불려가 그 내용을 발표했다가 욕만 먹은 뒤로는 학회라는 것에 울림증이 생겼으니 여기서도 카뮈 비판을 할 용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강점기 35년의 악몽을 아직도 지울 수 없듯이 그 네 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프랑스가 알제리에 남긴 상처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으나 프랑스는 지금까지 사과 한마디 한 적이 없다. 하기야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는 영국이 인도를 비롯한 구 식민지에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치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과거에 대해 사과를 한 독일이 식민지로 지배한 로디지아(짐바브웨) 등에 사과한 적이 있는가? 그러니 제국주의 노략질을 그런 나라들에게 배운 일본이 저런 식으로 나오는 것을 탓하기도 쉽지 않다. 배운 대로 하니 말이다. 차라리 가르친 놈을 욕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그래도 내가 쓴 책이 거의 팔리지도 않았고, 그 책 외에 카뮈를 제국주의자라고 비판한 책이나 글도 거의 없었으니 그가 알제리 독립에는 철두철미 반대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여기서도 밝혀두자. 한국에는 카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카뮈가 알제리 독립을 반대한 것에 대해서도 독립 후 알제리의 혼란을 보면 옳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가 조선 독립에 대해 그렇게 주장할 수 없다면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조선 독립은 당연한 것이지만 알제리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인종차별주의자에 불과하다.

 

『페스트』에는 나오지 않는 알제리 사람들

알제리를 여행하다 보면 카뮈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놀란다. 카뮈의 생가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에 나오는 많은 지역과 건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지만, 그것들을 기념하기는커녕 그것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없다. 오로지 카뮈가 좋아 알제리를 찾아가서 생가조차 아무런 표시가 없어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그들이야말로 웃기는 사람들이 아닌가? 일제강점기에 인천이나 부산 앞바다에서 해가 너무 부신다고 조선인을 쏘아 죽였다는 소설을 쓴 일본인 작가가 있다면 그를 우리나라에서 기념할 것인가?

『페스트』는 우리의 치부인 불평등과 차별을 그대로 보여주는 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방금 한 말을 오해하지 마라. 『페스트』에 그런 불평등을 고발하는 묘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에서 알제리인들을 아예 제외한 것이 알제리인들에 대한 불평등한 차별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에서 만들어진 베트남 영화에는 주연이나 조연은 물론 없지만, 미국의 폭격으로 죽어가는 베트남사람들의 모습이라도 엑스트라들로 나왔다. 그러나 『페스트』에는 알제리인들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시체조차 없다. 그래서 오랑은 마치 프랑스의 도시 같다. 거기에는 백인들만 산다. 

'페스트'(1947)
'페스트'(1947)

지금 프랑스나 미국이나 무엇이 다른가? 그곳에는 수많은 비백인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주연이나 조연으로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미국에서 비백인,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코로나19의 감염률이나 사망률이 백인들의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의 상당수는 의료서비스에서 제외되어 있다. 2014년에 와서 처음으로 공공의료서비스에 포함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의료 관련 사보험에 들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아프면 그냥 죽어야 한다. 미국이 그렇게 된 것은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 역사상 최초로 사회보장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의사들의 반대로 유독 의료보험이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에게도 빈민이 환자로 보이지 않는 것은 『페스트』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정의보다 어머니를 택한 카뮈

물론 『페스트』를 그런 점에서만 비판할 수는 없다. 드리어 그 소설은 아나키즘 소설로 볼 가치가 있다. 카뮈는 역사 속의 반항적인 정신은 부르주아 허무주의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아나코-신디칼리즘이라고 보았다. '공동체와 같이 신디칼리즘은 현실의 이익, 추상적이고 관료적인 중앙 집권주의의 부정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권위주의적 사고에 잠긴 아나키즘 전통에 대한 메시지를 표현한다.

카뮈의 아나키즘은 1952년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사르트르와 공개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카뮈는 스탈린주의와 관련이 있는 것을 거부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좌파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사르트르는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이 지지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봉기는 더 큰 충돌로 이어졌고 두 사람 모두 탄압을 비난했지만, 사르트르는 스탈린주의가 필요악이었고 러시아 공산주의가 여전히 더 민주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카뮈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가능한 진화는 없다고 주장했다.

1957년 혁명적 신디컬리스트 저널인 <프롤레타리아 혁명(La Révolution Prolétarienne)>에 역설적으로 실린 연설에서 그는 각자의 자유는 동료들의 자유에 묶여 있으며, 이러한 자유는 국가가 인정해야 하는 우월성의 법률 기관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회민주주의의 고전적 자유주의 방어에 도달했고, 카뮈는 간디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핵무기가 국제관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출생지인 알제리 문제에 대해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알제리 독립을 진심으로 옹호한 반면, 카뮈는 독립전쟁 동안 모든 면에서 중재를 요구하고 식민 체제 하에서 알제리와 프랑스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카뮈가 1957년 노벨상을 받았을 때, 알제리 학생이 카뮈의 연설을 중단하고 알제리에서 자행된 고문을 비난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정의를 사랑한다고 답했지만, 정의와 그의 어머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정의 이전에 어머니를 선택함으로써 카뮈는 자신의 부족, 국가 및 종족을 선택하였다. 불행히도 카뮈는 자신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년 후인 1960년 1월, 그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돌아오는 기차표가 그의 주머니에 있었다. 다시 한번 카뮈의 부조리가 승리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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