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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0] 아나키스트임을 부인했으나, 아나키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0] 아나키스트임을 부인했으나, 아나키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0.11 0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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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6년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감시와 처벌』을 한국 최초로 번역했으나, 7년 뒤 오생근 교수가 번역한 『감시와 처벌』에 의해 나의 번역서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듯하다. 나의 어설픈 프랑스어 해독력과 달리 서울대 불문과 교수가 새로 번역해주어 다행이다. 다행히도 몇 년간 내 책은 읽혔고, 교수신문에서는 언젠가 『오리엔탈리즘』(1978)과 함께 그 책을 한국 지성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책 10권에 포함시켜주었다.

나는 푸코 연구자도, 프랑스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한 자도, 프랑스어 번역자도 무엇도 아니면서도 그 책을 번역한 이유는 우리에게 꼭, 빨리 소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이다. 『감시와 처벌』의 원저는 1975년에 나왔으니 내가 번역한 것도 21년 뒤였다. 나는 1980년대 초에 그 책을 읽고 감동하여 번역본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했다. 10여 년을 기다려도 번역 소식이 없어서 내가 번역해냈다. 1978년에 원저가 나온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을 기다리다가 내가 1991년에 번역한 것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고 있지 않은데 이 자리를 빌려 제발 누군가가 더 좋은 번역을 내어주시기를 바란다.

 

역사·철학 성적 좋았던 학생에서 프랑스문화원 원장까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위키피디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사회이론가인 미셸 푸코는 아나키스트로 불리지만 사르트르처럼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심오한 아나키즘 정신이 그의 저술에 스며들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식이 권력과 지배의 도구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그의 훌륭한 분석은 많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푸코는 1926년 부유한 의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수학 성적은 좋지 못했으나 프랑스어, 역사,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철학의 성적은 뛰어났다. 그러나 뒤에 그는 학교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받은 수업을 경멸했다. 에콜 드 노르말에서도 푸코는 외톨이로 지냈으나 루이 알튀세르와 친구가 되었다. 당시 노르말의 유행처럼 그도 공산당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 전에 학생조합에 가입하지 않아서 입당을 거부당했다. 그 뒤 1950년에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스탈린 독재의 실상을 알고서는 3년 뒤에 탈당했다.  

1951년부터 55년까지 알튀세르의 요청으로 노르말에서 심리학을 가르쳤고 1952년 병리심리학 학위를 받고 교도소와 병원에서 수련 생활을 했다. 교수 경력에 관심이 없었던 푸코는 1955년부터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의 문화 지도 교사를 지냈고, 1958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나 정치경찰로 인해 이듬해 그곳을 떠나 서독의 함부르크에서 프랑스문화원 원장으로 일했다.  

 

이성에 대한 푸코의 이유 있는 비판

『광기의 역사』(1961)=위키피디아
『광기의 역사』(1961)=위키피디아

1961년에 쓴에서 그는 의미 있는 불합리('어리석은 지혜')로 간주된 광기가 18세기 말에 질병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식의 변화를 발견했다. 이어 『말과 사물』(1966)에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근본적인 코드(에피스테메'epistemes')를 공개함으로써 인간 과학의 고고학을 시도하여 이성과 과학을 통해 진보를 가져온 계몽주의를 기념하기는커녕 그것을 인간의 고통과 사회적 통제의 강화로 보았다. 이성을 통해 자유를 획득한다는 계몽주의 사상에 반대한 푸코는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며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계승한 현대 사회는 이성이 인간을 억압하는 곳이라 비판했다.

1970년 이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상사 교수를 지내면서 1975년에 낸 『감시와 처벌』에서는 계몽주의에서 현대적 처벌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추적했다. 그에 의하면 계몽주의 이전의 스팩타클 사회는 1830년 이후 감시사회로 변했다. 즉 고문의 남용은 억제되었으나 대신 지극히 세밀한 형벌 규칙이 나타났다. 감시사회는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성, 효율성, 기술성, 생산성에 적응하고 거기에 맞는 순종적 인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인간은 선량한 시민과 불량한 시민으로 나누어졌다. 감옥은 범죄자를 줄이기는커녕 범법자를 구별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형식적 평등과 정교한 법을 통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미시적 권력의 모든 체계를 유지했다. 이처럼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이용하여 권력과 지식의 연관성을 폭로했고,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는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의지와 같다고 보고, 이를 지식의 생체적 권력이라고 불렀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현대 사회

『감시와 처벌』(1975)=프랑스 위키피디아
『감시와 처벌』(1975)=위키피디아

푸코의 중심적 통찰력은 처벌하는 힘이 치료나 교육의 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으로 전환된다. 그는 “교도소가 공장, 학교, 병영, 병원을 닮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경향은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덤(Jeremy Bentham)이 설계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모델'감옥으로 가장 잘 상징된다. 푸코는 특정한 감시자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고 현대 사회는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감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적 권력에 대한 일반적인 분석을 하게 되었다. 푸코의 현대 문화를 특징짓는 것은 강압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니체를 따라 비경제적 관점에서 권력을 바라본다. “권력은 전쟁이고, 다른 수단으로 계속되는 전쟁”, 즉 ‘무언 투쟁’이다. 억압조차도 권력의 하위 효과이다. 권력은 인간 조건의 지울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부르주아 사회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인 징계권을 발명했다. 주로 지구와 그 산물에 대해 행사되었던 주권과는 달리 징계권은 감시라는 형태로 '인체와 그 작용'에 집중되어있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지식의 변증법에서 이성은 권력의 기술이 된다. 그리고 학문은 지배의 도구이다. 

나아가 그의 미완성 저술인 여러 권의 『성의 역사』(1978-84)에서 푸코는 자아가 어떻게 내부로부터 권력의 먹이가 되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고대인의 에로티카에서 기독교 시대의 고백적 통제에 이르기까지 섹슈얼리티의 변화를 추적했다. '고백하는 동물'로서 서양인은 사회-성적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초, 개인은 정신병의 정신과학화와 교도소의 확산과 거의 동시에 성의 주체로 자각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일부일처제 이성애 커플을 도덕의 모범이자 원천이자 사회의 기둥으로 세움으로써 자기주장을 위한 성 규범을 만들었다. 따라서 성은 정교하고 비인격적인 쾌락의 원천인 고대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탐구와 고백하는 개인의 선입견으로 재구성됐다. 푸코는 마르크스주의 경제 분석에 대응하여 권력에 대한 니체의 심리적 이해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억압이 권위주의 사회의 산물이라는 빌헬름 라이히의 견해는 거부했다. 푸코에게 권력에의 의지, 특히 성적 지배의 형태는 역사의 과정에서 그 형태가 변할지라도 항상 인류에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는 태도에서부터 그를 혁명에 대한 뚜렷한 반 유토피아주의로 이끌었다. 그는 기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아나키즘보다 니체적 개인주의에 영향을 받은 푸코의 구조주의

노엄 촘스키
노엄 촘스키=위키피디아

197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촘스키와의 텔레비전 토론에서 푸코는 사회 모델을 그리는 것을 거부하고 혁명가의 임무는 권력을 정복하는 것이고, 사회의 지배적 계급 이익을 반영하는 추상적인 정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정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푸코가 아나키스트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지배의 한 형태로서 현대 문화를 묘사하는 것은 계몽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는 모든 혁명이 국가를 유지하면 스탈린주의로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관습적인 형태의 정치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탈중앙화되고 자발적인 혁명 운동을 선호했고 이로 인해 1968년 파리에서 학생반란을 지지했다. 당시 그는 탈옥을 시도하는 것이 죄수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는 정의의 법정뿐만 아니라 혁명적 재판소도 거부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계급투쟁을 거부하지는 않은 반면, 여성, 수감자, 징집 군인, 병원 환자 및 동성애자가 '특정 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투쟁을 하도록 촉구했다.

푸코는 많은 현대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거부했다. 푸코가 보기에 이는 계몽주의의 비참하고 강압적인 분파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한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 책이… 화염병이나 지뢰밭이 되기를 바란다. 불꽃놀이처럼 사용된 후 자폭하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르쿠제와 함께 '아나키즘과 반문화의 결혼식을 주재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과장된 것이다. 푸코는 권력을 정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것은 절대로 완전히 해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푸코의 독보적인 형태의 구조주의는 아나키즘보다는 니체적 개인주의에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 분석과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에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메르키오르를 비롯하여 푸코를 네오 아나키스트로 보는 견해가 있다. 푸코가 근대문명의 강압성을 비판하면서도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상에 대한 과학성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를 강단허무주의자나 반유토피아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로 보는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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