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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왜’ 필요한가
철학은 ‘왜’ 필요한가
  • 김신자
  • 승인 2021.10.13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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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_철학을 공부하는 이유

수단으로서 과학기술과 달리 철학은 정신세계를 다룬다
사색은 인식의 바탕으로서 인간을 물욕에서 해방시킨다

수년 전 어느 가을 날, 유럽에서 잘 알려진 의학자와 점심을 같이했다. 식사 후 여러가지의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물었다. “의학은 건강한 삶을 위해 기술과 방법을 연구개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때때로 생각하는데, 철학은 인간을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항상 인간의 육체적 세계만을 보아온 의사. 그에게 아마도 정신세계를 논구하는 철학의 현실성이 떠오른듯 했다. “병이나면 사람들은 병원에 가지요. 그러나 건강을 찾으면 그들은 즉시 자신을 생각하며 자기세계의 실현에 몰두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은 무의식중에 철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의학이 삶을 위해 수단이라면, 철학은 삶의 목적에 대한 추구와 구현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교수가 책을 주면서 그것을 외우라고 했다. 법학도와 의학도는 언제까지를 물었다. 그에 반해서 철학도는 반문했다. 왜 그것을 외워야 하는가 하고. 자기 생각의 강한 표현으로써 ‘왜’는 내용과 의미의 포괄성을 지닌다. 그것은 철학의 기반으로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숙려와 해결의 주축이 되는 것이다.

핀란드의 화가 Vilho Lampi(1898∼1936)가 그린 「숙고하는 자(Ponderer)」(1929). 사진=위키아트

인간은 삶 가운데서 죽음과 고통, 전쟁이나 빚 등의 한계상황(칼 야스퍼스의 용어)에 직면하게 된다. 극한상황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며 절망적으로 묻는다. 왜 이러한 일을 당해야 하는가. 어두움은 우리를 참담과 고뇌의 깊은 늪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도록 한다. 칼 야스퍼스(1883∼1969)에 따르면, 밝은 의식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차원의 빛 가운데서 정신적으로 깨어나게 될 때 철학은 나타난다. 철학을 통한 빛은 절망 가운데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한계상황에서 물음으로 깨어나는 빛

철학은 인간 존재의 전체와 진리에 대해 탐구한다. 인간에게 전개되는 삶의 내용, 그의 운명과 경험 등은 철학에서 중요하고 유효한 전제가 된다. 또한 진리에 대한 깊은 사색과 깨달음은 중요한 인식의 바탕을 이룬다. 그러므로 철학은 다른 학문적 인식보다 진리의 빛을 더 깊고 넓게 포착한다. 우리의 삶은 인간 존재의 포괄적인 의미와 진리의 탐구를 통해 가치를 지니며 빛을 발하게 된다. 따라서 그에 의해서 이룩된 전통과 문화, 역사는 찬란한 유산으로서 영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철학은 실용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인 이익과 손해의 속박으로부터 철학은 인간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사려 깊은 이성적 판단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다른 가능성의 길을 찾도록 한다. 그래서 철학은 인간의 모든 것과 조화되고 합치되는 합일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과 빈(Wien) 대학교에서 철학의 위치는 중요하다. 학생들은 철학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상업주의 물질 기계문명을 벗어나고, 순수한 정신, 인간존재와 진리의 탐구에서 희망적인 세계의 지평을 추구한다.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이론이나 적당히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물질의 범람 속에 매몰돼 인간과 진리의 고유성,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의 수립을 위해 삶과 직접적인 연관의 구체성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진지하며 학구적이다.

야스퍼스의 개념을 빌리면, 철학은 인간이 취해야할 길과 사상의 다양함을 일목요연하게 이론으로 전개한다. 삶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내적으로 통찰하는 철학은 때로 우리에게 난해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려와 분별력을 통해서 철학은 삶에 전환점과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우리자신의 삶을 위해 가치있고 필요한 것이다.

철학이란 다른 학문과 같이 공식화되고 논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오직 긴밀한 정신적 교재를 통해서만 철학이 사람의 영혼 속에 불꽃처럼 점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플라톤은 철학을 함축성있고 깊이 있는 정확성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그의 철학에 대한 논지를 두고두고 음미해 보아야할 것이다.

 

 

김신자
전 비엔나대 철학과 교수

고려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비엔나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엔나대에서 비교철학·문화철학을 가르쳤다. 『김수평과 그의 예술』, 『정다산의 철학사상』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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