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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쟁점: 한겨레는 어떻게 변신중인가
사회쟁점: 한겨레는 어떻게 변신중인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6.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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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의 심층성 높아져...모토에서 방향제시 안되고, 논조의 이념적 혼선 여전

한겨레가 지난 5월 중순 창간 17돌을 맞아 ‘혁신호’를 발간하며 ‘제2의 창간’을 외쳤다. 1면에 길게 선언문을 게재하고, 지면혁신방안을 굵은 글씨로 툭툭 찍어놓았다. 17년 동안 눈에 익었던 글씨체도 바꾸고, 섹션신문은 타블로이드판으로 반토막을 내는 대신, 콘텐츠의 분량과 밀도를 강화하고, 종류를 다변화해서 달라지고 싶다는 의지와 달라지고 있다는 눈빛을 실었다. 신문시장에 삭풍이 불어 닥쳤던 작년 겨울 80여명을 명예퇴직으로 떠나보냈던 만큼 사건에 달려드는 기자들의 필치에도 남다름이 묻어났다.

그리고 한 달이 경과했다. 한겨레가 새롭게 진주시킨 묵직한 기획들이 한 사이클을 돌았다. 한중일 공동교과서 등 몇몇 개가를 올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등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활기를 되찾은 한겨레의 변신은 과연 성공적이었나. 어떤 색다른 앵글과 통찰이 번득였는가. 아직 평가는 이르지만 진보적 언론의 거듭나기를 지식인 사회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소위 진보적 386·486으로 묶이는 학자들 가운데 한겨레를 챙겨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으로만 봐서 구체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글씨체가 바뀐 건 얼핏 봤는데 제대로 읽진 못했다”, “프로젝트 때문에 집에 통 못 들어가서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답변이 많았다. “한겨레를 읽지 않는다”는 학자들은 그보다 두세 배 많았고, 요즘 아예 신문을 안본다의 경우는 그보다 1.5배가량 많았다.

사실보도에서 심층성 높아져

하지만 뉴욕타임즈와 르몽드가 독자수가 많아서 영향력이 높은 것은 아니다. 한겨레의 변신을 주목하는 소수의 열독자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대표적인 이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이다. 박 교수는 대뜸 “기사가 깊어졌다”라고 운을 뗀다. 그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정치, 외교, 통일, 지역 등의 현안에서 심층기사가 많아졌다고 반가워한다. 오늘날 신문위기의 한 원인으로 사실보도의 실종과 탐사성의 약화가 거론되는 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높은 평가다. 박 교수는 “사실 전달의 품격을 보여주면서 논조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목소리를 내는 절묘한 결합”이 필요하며 “신문의 품격은 잘 모르는 사실, 알고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사실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데서 생겨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섹션들의 정보가 다양하고 재미있어졌다”라는 독후감을 보였다. 18.0도, 36.5도를 카피로 사용한 각종 정보섹션지들을 염두에 둔 얘기였다. 과연 한겨레가 깊이와 재미의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인가. 17년동안 한겨레를 빼놓지 않고 봐온 이영주 성균관대 강사(신문방송학)는 “차분해져서 좋다”라고 하나 더 얹는다. 그는 “요즘 신문들이 텔레비전을 닮아서 조잡해지는데 그런 표피적인 정보에서 한계를 느껴오던 차에 반가웠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반응들에는 뭔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제2의 창간’에 값하는 변화를 적시하는 멘트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한겨레의 제2의 창간모토는 “세계와 당당히 경쟁하는 신문”이다. 왜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가. 조선·중앙·동아가 진입하지 못하는 지점을 독차지한 것이 아직 한겨레의 정체성이라면, 과연 위의 구절은 경쟁현실에 기반한 모토라 할 수 있는가.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근대사)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한겨레가 진보적 대안언론으로서 갖는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라고 전제한 뒤 “이번 변화에서 지난 1987년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라고 외치던 것에 준하는 시대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꼬집었다.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에 오면 좀더 시니컬해진다. 김 교수는 “정치면은 뭔가 한겨레답지만, 사회·경제면에서는 평범하다”, “섹션에 실린 비평적 글들을 봤는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라고 평가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한겨레가 “너무 많이 받아들여서 털어내야 할 것을 털어내지 못하다보니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한다. 좌파에서 중도까지 전부 아우르며 종합일간지로 성장해온 것은 한겨레의 양달과 응달을 모두 가리킨다. 김 교수는 한겨레가 변신을 꾀하며 이 중 몇몇 블럭은 어떤 방식을 써서든 털어내길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사실 그게 어렵다”라고 말을 맺었다.

한겨레에 등장하는 사람들, 필진이나 칼럼의 논조에 오면 독자들의 표현은 다소 격렬해진다. 김성재 조선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제2의 창간 이후 한겨레 구독을 끊을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이유는 “한겨레의 기백이 사라졌다”는 것. “창간에 나온 사람들이 사회명망가 중심의 스타들로만 꾸려놓아서 보기 좋지 않았다”라고 비판하면서 그는 “황우석 팔아먹기에는 한겨레가 가장 세속적이었다”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리고 “국민들을 대상으로 모금을 하는 것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87년 모금으로 창간한 건 세계언론사에 없는 사례였지만, 현재의 그것은 변질되고 퇴행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편의적인 필자동원 ‘아쉽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철학)는 “한겨레가 운동 엘리트주의를 극복하려고 신문 내용을 바꾸다보니, 지금은 지적 엘리트주의로 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일류대 중심의 필진들이 유독 두드러지며, 기자들과 가깝게 지내거나 편하게 동원할 수 있는 주변의 필진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점을 꼬집으며 “안이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며 심하게는 패밀리즘으로까지 보인다”라고 비판했다.

신중섭 강원대 교수(철학)는 일주일에 세 번 한겨레를 직접 사서 본다. 보수신문과 다른 앵글을 사용하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그는 “조선일보가 윤평중, 이진우를 넘어서 이주향 수원대 교수 같은 진보성향 학자들을 포섭하며 필진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게 한겨레에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아쉬움을 표한다. 그는 “류근일 논설위원이 조선일보에서 아무리 심한 보수반동에 가까운 글을 써도, 조선일보는 류근일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류근일은 조선일보에 스펙트럼을 보태는 작용을 한다”라며 충고도 던진다. 스스로를 보수로 분류하는 신 교수는 “좌파든 우파든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고민을 한다. 이걸 한 데로 수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사를 통해 계급색을 드러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통계로 증명하는 방식도 금방 무뎌진다”라고 말을 맺었다.

‘색깔’인가 ‘정보’인가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한겨레의 변화가 좀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도 훈수두기가 격려하기보다 다소 앞섰다. “색깔이 무뎌지면 상업적으로도 실패한다”라는 지적, “조선·동아 등이 타블로이드 북섹션을 시도했다가 광고수주가 안 돼 다시 대판으로 폈고, 중앙은 아예 신문을 잡고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안쪽으로 밀어넣었는데도, 왜 한겨레는 모험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내부에서 운영진과 기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빨리 수습돼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정해서 내달렸으면 좋겠다”라는 견해는 현재의 한겨레가 어딘가 ‘엉거주춤’의 형상을 하고 있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가령 한 학자는 이런 예를 든다. “북섹션에 잡지성 칼럼이 한 면도 모자라 두 면에 걸쳐서 실리는데, 내용에 맞는 형식인지 의문이 든다”라는 것. 즉, 칼럼이라는 글쓰기가 8~10매로 간단히 말하고 끝내도록 장르적으로 세팅된 글쓰기인데 현재의 북섹션 칼럼은 외면상으로는 하나의 주제를 묵직하게 펼치는 잡지의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소재나 주제는 대판 본지에서의 칼럼과 별 차이가 없다. 이런 지면의 운용이 결국 ‘정보의 부족’을 낳고, 한겨레를 읽은 후 다른 신문을 다시 찾아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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