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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투하는 문장들
삼투하는 문장들
  • 이지원
  • 승인 2021.10.22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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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경 지음 | 소명출판 | 468쪽

 

비주류의 도전

『삼투하는 문장들-한국문학의 젠더 지도』는 이선희, 지하련, 최정희, 오정희, 김향숙, 권여선, 조한혜정 등의 빼어난 ‘여성 문장가’와, 이기영, 최인훈, 백낙청, 김우창, 박현채, 리영희 등 한국문단과 학계를 대표하는 남성 지식인-문인의 텍스트를 종횡무진 누빈 필자의 연구서이다. 주류 남성 지식인과 문단 권력의 아성이 여지없이 흔들리고, 비주류나 문단 바깥의 인물들이 그 빈 곳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장면들이 이 책 속에 고루 담겨 있다. 

 

여류 그 ‘이후’ 또는 여류 저 ‘너머’

1부 ‘여류, 그 이후’에 실린 일곱 편의 글은, 익숙한 텍스트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뒤집어 보아 낯설게 만들거나, 낯선 텍스트의 문제성과 현재성에 주목하여 우리 소설사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원으로 만들고자 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이를테면 널리 알려진 이기영의 『고향』이 ‘생산이 아닌 ‘재생산’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해부하거나,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최정희의 『인간사』가 어떤 의미에서 196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읽힐 수 있는지 등이 설득력 있게 논의되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세대 서사의 낡은 상상력에 대비되는 새로운 세대-젠더 서사의 흐름을 포착한 논문도 눈에 띈다. 

 

비평사ㆍ문학사의 탈구축 

2부 ‘이론의 안테나와 비평의 파토스’에는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우리 문단과 학계에서 벌어진 주요 논쟁 및 그와 관련된 이슈들을 필자 특유의 신랄한 어조로 분석한 글들이 실려 있다. 백낙청과 ‘창비’가 표방한 민중지향성을 해체주의적으로 읽어내거나, 1980~90년대를 박현채나 조한혜정 등 문단 바깥 지식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등의 작업이 여기 속한다.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만남이라는 지성사적 사건에 대한 독창적 해석도 이루어지고 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는 방법론적 렌즈 

3부 ‘코스모폴리탄 글쓰기’는 이상, 최인훈, 김우창, 리영희의 글쓰기에서 발견되는 어떤 특질들을 코스모폴리타니즘이라는 개념으로 묶어 본 것이다. 문학과 철학, 상상력과 윤리, 개인사와 인류사가 멋지게 교차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 이들 텍스트는, 한국문학에서 새로운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계보 그리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삼투하는 문장들

문장과 현실의 상호 스며듦을 표현한 ‘삼투하는 문장들’이라는 표제에는, 이처럼 재현론적 관점의 연구 관행에 대한 필자 나름의 미학적ㆍ정치적 도전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명문(名文)이 관계 맺는 시간은 다가올 미래라는 인식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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