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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 성공의 비밀
[글로컬 오디세이]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 성공의 비밀
  • 박윤주
  • 승인 2021.11.11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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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학 전문가가 바라본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의 교훈
글로컬 오디세이_박윤주 계명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회의사당 건물 밖에서 낙태 합법화 지지 시위대가 상원이 임신 14주 이내에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AP

2020년 겨울, 전 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중 아르헨티나에서 들려온 낙태 합법화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낙태 합법화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온통 녹색으로 차려입은 수천, 수만 명의 여성이 아르헨티나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기쁨에 겨워 얼싸안은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아르헨티나 여성운동의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교황의 나라 아르헨티나의 낙태 합법화는 극적이면서도 전격적인 사건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낙태 합법화는 아르헨티나 여성운동이 역사 속에서 겪어낸 수많은 시행착오와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 성찰의 산물이며, 여성운동의 메시지가 더 많은 지지를 조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확장된 결과다.

1921년 낙태법이 제정된 이래, 아르헨티나는 가장 강력하게 낙태를 금지해왔던 나라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 형법은 여성의 삶이나 건강이 임신으로 인해 위험에 처했거나, 지적 장애가 있는 혹은 심신이 미약한 여성이 소위 순결을 빼앗는 강간으로 임신한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했다. 근본적으로 낙태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임신이 낙태가 허용되는 범주에 속하는지를 판단하기 어려웠고, 낙태를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적대적이고 복잡한 행정절차 속에서 합법적 낙태를 포기했어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아르헨티나 여성계는 일찍이 낙태 합법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낙태의 전면금지를 시도한 1994년 메넴 정부의 개헌 시도에 맞서서 여성단체들은 108개의 여성단체가 결합한 '선택의 자유 운동'을 조직해냈으며, 여성들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과 생식권이 더는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퇴행적 개헌 시도를 저지했다.

강력한 낙태 반대 여론 속에서 대체로 방어적이기 급급했던 아르헨티나 여성계는 2010년대에 이르러 상당한 변화를 경험한다. 여성단체들은 노동조합, 학교, 도시공동체 단위에서 다양한 소통을 통해 여성들이 일상 속에서 느끼는 낙태의 필요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낙태 합법화가 여성의 몸에 대한 개인적 권리의 확대라기보다는 불법 낙태 시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위험을 줄이는 공동체의 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나아가 불법 낙태를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에 속해있으며, 불법 낙태를 받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이 목숨을 잃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각은 아르헨티나 여성계가 낙태 합법화를 젠더, 노동, 시민권 그리고 인권까지 아우르는 주제로 확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 결과, 2018년 대규모 낙태 합법화 시위에서 나타난 “부유한 여성은 낙태하지만 가난한 여성은 사망한다” “가난한 여성들만 죽는다”라는 외침들이 아르헨티나의 불평등을 고민하는 노조를 포함한 여러 시민단체의 지지를 받게 됐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빈번한 여성 살해 저항 구호인 “한 명의 여성도 더는 살해되어서는 안된다(Ni Una Menos)”를 낙태 합법화 운동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낙태 합법화의 문제를 인권유린과 폭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시민들까지 포용하는 광범위한 낙태 합법화 연대가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목격한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의 확장성은 멕시코의 페미사이드 반대 시위와 칠레의 사회 대변혁 요구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올해 3월 멕시코에서 열린 여성 살해 반대 시위는 멕시코의 오랜 치안 문제 그리고 정부의 부패를 함께 꼬집는 전시민적인 움직임으로 거듭났고, 세계 여성의 날에는 무려 8만 명의 시민들이 시내에 집결해 멕시코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한 정부의 책임 있는 대응을 요구했다. 2019년 겨울, 칠레의 사회대변혁 요구 시위에서 등장한 “강간범이 네가 가는 길에 있다”는 플래시몹은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에도 불구하고 칠레 여성이 일상 속에서 겪어내는 성폭력을 공권력의 폭력성, 사법제도의 부패 그리고 사회 전반의 가부장적 질서가 갖는 부조리와 연결함으로써 칠레 시민 전반의 지지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뉴욕, 파리, 베를린 그리고 한국에서까지 시민들의 동참을 끌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젠더 이슈는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부조리와 연결되는 크로스 커팅 이슈다. 모든 문제 안에 젠더가 있고 젠더 안에 모든 문제가 공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젠더 이슈의 확장성을 최대한 활용해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내는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의 전략은 효과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설명하는 요인이 된다.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의 확장성은 젠더 이슈가 소통보다는 갈등을, 대안보다는 혐오를 의미하게 된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도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인 젠더 불평등을 모두가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지혜를 자신을 확장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던 라틴아메리카 여성운동에서 배울 일이다.

 

박윤주 계명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라틴아메리카지역학 석사,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로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 인종, 젠더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에서 니냐스 노 마드레스(Ninas, no Madres)까지: 사회운동이론의 틀 정렬(Frame Alignment)을 통해 본 아르헨티나 낙태 합법화 운동」(2021),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본 민주화 운동의 성공: 멕시코 68 민주화 운동과 5·18 민주화 운동을 중심으로」(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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