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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4] 유럽 녹색당의 토대를 다진 반 두인과 카부터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4] 유럽 녹색당의 토대를 다진 반 두인과 카부터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1.0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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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 반 두인
아스파르 그로트벨트. 사진=위키미디어
여스파르 그로트벨트.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스 밖 유럽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시작된 유일한 곳은 네덜란드다. 60년대 중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프로보스'(Provos) 운동은 아나키즘 세력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운동은 철학과 학생인 로엘 반 두인(Roel van Duyn, 1943~)과 아나키즘 예술가 로버트 야스파르 그로트벨트(Robert Jaspar Grootveld, 1932~2009)이 월간 잡지 <프로보>(Provo, 네덜란드말로 도발이라는 뜻)를 간행하는 것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로보스는 잘 짜여진 시위와 시위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프로보스의 접근방식은 비폭력적이고 장난스러우며 유토피아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잠재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를 풀어 주고자 했다. 그들은 권위가 관용적인 가면 아래에 숨은 강압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게임, 풍자 및 모방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에 대한 개인 자동차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암스테르담 전체에 흰색 자전거를 두는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경찰이 자전거가 자동차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에서만이 아니라 도난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전거를 몰수하기 시작할 때까지 성장했다. 계획이 시 당국에 의해 거부된 후에도 프로보스는 이를 계속 진행했다. 그들은 50대의 자전거를 흰색으로 칠하고 공공장소에서 사용했다. 

프로보스의 시위. 사진=위키미디어
1966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프로보스의 시위로 암스테르담에서 벌어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네덜란드 사회의 고도 산업화와 높은 인구 밀도를 감안해 프로보스는 환경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공기 오염 물질에 과세를 하고 흰색 굴뚝 계획이라 하여 심각한 오염 물질의 굴뚝을 흰색으로 칠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기 위한 의도로 조언과 피임약을 제공하는 흰색 여성 계획, 암스테르담 경찰의 무장해제를 위한 흰색 치킨 계획, 건물의 투기를 금지하는 흰색 주택 계획, 다섯 커플의 그룹에서 공동육아를 하는 흰색 키즈 계획, 전기 자동차를 카 셰어링하는 흰색 카 계획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프로보스는 프랑스의 상황주의자들처럼 프롤레타리아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로서 히피, 실패자, 학생과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 같은 '프로보타리아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의식적인 아나키스트였다. 1만 부나 발행된 잡지 <프로보>(Provo)는 아나키즘을 저항에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간주했으며, 아나키즘을 되살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중심 이론가인 반 두인은 특히 자신을 아나키스트 전통과 동일시했다. 

 

반 두인의 아나키즘

로엘 반 두인. 사진=위키미디어

예술과 철학을 공부한 반 두인은 네덜란드 아나르코-평화주의자 페르디난드 도멜라 뉴벤후이스(Ferdinand Domela Nieuwenhuis, 1846~1919)에게서 영감을 받은 아나키즘 그룹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반 두인은 또한 크로포트킨의 주장, 특히 핵심적인 진화요인으로서의 협력, 사회의 완전한 혁명에 대한 요구, 도시와 국가 간의 균형에 대한 비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프로보스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966년 지방 선거에 참여하여 의석 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도발적인 성격은 필연적으로 경찰과 충돌했다. 이 운동은 1966년 연막탄으로 네덜란드 왕실에 속한 베아트릭스 공주의 결혼식을 방해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폭동이 계속 이어졌으나 1년도 안 되어 끝났다.

1967년 5월 13일 프로보스의 일원이 '프로보스의 죽음'을 선포했다. 프로보스가 취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에 대해 우려한 반 두인은 소비자 사회 및 중앙 집중식 권력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이전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처럼 그는 낡은 껍데기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결정했다. 그는 이제 프로보스가 창의성보다 사랑을 더 강조해야한다고 느꼈다.

자연과의 긴밀한 유대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그는 활력을 되찾은 리버테리언 운동의 상징으로 엘프 또는 놈(gnomes)을 뜻하는 카부터(kabouter, 요정이라는 뜻)의 모습을 선택했다. 반 두인은 현대 카부터스의 역할은 장난기 많은 기술자라고 생각했다. <현명한 카부터의 메시지>(Message of a Wise Kabouter, 1969)에서 그는 건강한 유기체가 스스로를 더 잘 통제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와 아나키즘 연결 시도를 했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평가에서 크로포트킨보다 덜 낙관적이었다. 극복해야 할 '우리 각자의 작은 독재자'가 있다고 한 그는 크로포트킨의 실증주의를 넘어 사랑과 침략의 결합에 기반한 형식적인 변증법을 개발했다. 크로포트킨의 상징은 근면하고 협조적인 개미였지만 반 두인은 공작나비를 선택했다. 그 평범한 존재 방식은 사랑과 협력을 기반으로 하지만 날개를 펼치고 위협적인 눈을 드러냄으로써 포식자를 겁주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70년 2월 카부터는 '오렌지 자유국'(네덜란드 왕실을 일컫는 말)이라는 대안적 공동체 형성을 발표했다. 그들은 기존 정부 부처에 필적하는 12개의 부서를 설립했다. 그들의 장난스러운 선포에서 새로운 사회가 썩어가는 줄기에서 나온 버섯처럼 낡은 사회에서 나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존 질서의 하위문화에서 대안 공동체를 성장시킬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옛 문화 사이의 긴장을 종식시킬 새로운 인간, '문화 엘프'와 함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이다. 부와 빈곤의 갈등도 재산을 집단화함으로써 극복할 것이다. '자유 국가'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정부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 형태는 결코 강제에 의지하지 않는 위원회 민주주의에 기반하여 반권위주의적이고 분산화될 것이다.”

운동에서 제도권의 정치로

카부터는 1970년대 초 네덜란드에서 조용히 무너졌지만 그 선거 전략과 카부터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유럽 녹색당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카부터는 1970년대 초 네덜란드에서 조용히 무너졌지만 그 선거 전략과 카부터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유럽 녹색당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사진=위키미디어

 

낡은 질서 속에서 새로운 자율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카부터는 비폭력, 방해 행위, '에로틱'을 권장했다. 요컨대, 그들의 사회 철학은 “더 이상 꽉 쥔 주먹의 신사회주의가 아니라, 엇갈린 손가락, 곧은 성기, 날아다니는 나비, 움직이는 시선, 거룩한 고양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아나키즘이다”라고 했다. 오렌지 나무가 새로운 사회의 상징으로 심어졌고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새로운 국가인 '뻐꾸기 노래'를 부르며 그 주위에서 춤을 추도록 초대받았다. 카부터스는 결코 정당을 만들지 않았고 광범위한 리버테리언 운동으로 남았으나, 자유 국가가 형성되고 6개월 후, 그들은 네덜란드의 6개 지방 자치 단체에서 11%의 득표율을 얻고 45명으로 구성된 암스테르담 의회에서 5개의 의석을 얻음으로써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후 비슷한 노선의 그룹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형성되었다. 이러한 의회로의 진출은 순수한 아나키즘으로부터의 후퇴였고 '자유 국가'는 용어상 모순이었지만, 반 두인은 그것을 아나키즘적 노선에서 자유사회를 만드는 평화로운 방법이라고 보았다. 카부터가 1971년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견해를 <공황상태의 일기>(1971)에 개인적인 형태로 표현한 후 페닉 소우(Panic Sowers)라는 새로운 그룹을 구성했다. 그의 동지들은 적들에 맞서 자연을 방어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당국에 공황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 운동은 1970년대 초 네덜란드에서 조용히 무너졌지만 그 선거 전략과 카부터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그들을 유럽 녹색당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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