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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6] 파괴적 아나키즘 파괴 저편의 아나키즘 예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6] 파괴적 아나키즘 파괴 저편의 아나키즘 예술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1.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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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갈로
라바숄
구스타브 쿠르베
카미유 피사로
장 마리 귀요
오귀스트 바이양
후고 볼
리햐르트 휠센벡
장 그라브는 "대리인을 제안하는 데 사용된 모든 돈이 다이너마이트를 사는 데 더 현명하게 사용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한 샤를 갈로는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독약을 던지고 총을 난사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장 그라브는 "대리인을 제안하는 데 사용된 모든 돈이 다이너마이트를 사는 데 더 현명하게 사용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한 샤를 갈로는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독약을 던지고 총을 난사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사상가들이 프랑스 국가에 대한 비판을 정교화하고 설득력 있는 아나코-공산주의 대안을 개발하는 동안, 일련의 화려하고 피비린내 나는 선전 행위는 대중들 사이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악명을 높여만 갔다. 1880년대의 절망적인 사회적 불안 속에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테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장 그라브는 당시 '대리인을 제안하는 데 사용된 모든 돈이 다이너마이트를 사는 데 더 현명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샤를 갈로(Charles Gallo)는 이에 동의하고 파리 증권거래소 갤러리에서 독약을 한 병 던진 다음 무작위로 권총을 쏘기도 했다. 전설적인 라바숄(Francois-Claudius Ravachol)은 2명의 프랑스 판사의 집에 폭탄을 설치했다. 그 판사들은 5월1일 데모 뒤에 두 명의 노동자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 사람이었다. 라바숄의 이름은 동사 - ravacholiser(폭파시키다)로 불후의 명물이 되었다. 테오듈 뫼니에(Theodule Meunier)는 라바숄이 경찰에게 배신당했던 막사와 식당을 폭격하여 주인과 고객을 살해했다. 오귀스트 바이양(Auguste Valliant)은  폭탄을 하원에 던졌으나 아무도 죽지 않았다.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는 부르주아지의 취약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파리 생라자르역의 카페 테르미너스(Cafe Terminus)에 폭탄을 던진 젊은 지식인 에밀 앙리(Emile Henry)였다. 그는 1명의 고객을 죽이고 20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재판에서 앙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오만한 승리는 방해받을 것이다. 그들의 황금 송아지가 그 받침대에서 격렬하게 흔들릴 것이며 그것이 오물과 오물 사이에 던져질 최후의 충격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에밀 앙리(Émile Henry, 1872~1894)가 생자르역 부근의 카페에 폭탄을 던졌다. 20명이 부상하고 1명이 죽었다. 저명한 코뮌 투사의 아들인 앙리는 높은 지성과 뛰어난 문장력의 소유자로서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으나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다. 법정에서 그는 “부르주아는 아나키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에밀 앙리가 생자르역 부근의 카페에 던진 폭탄으로 인해 20명이 부상하고 1명이 죽었다. 
법정에서 그는 “부르주아는 아나키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자신이 어떤 정부도 짓밟을 수 없는 국제적 아나키즘 운동의 일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당신은 시카고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독일에서 참수되고, 헤레즈(Jerez)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바르셀로나에서 총에 맞고, 몽브리송과 파리에서 단두대에 오르지만 결코 파괴되지 않는 아나키다. 그 뿌리가 너무 깊다. 그것은 썩어가고 무너지는 사회의 한복판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확립된 질서에 대한 폭력적 대응이다. 그것은 권위에 맞서는 모든 평등주의와 리버테리언의 열망을 나타낸다. 어디에나 있어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사형대에서 앙리는 외쳤다. “아나키 만세! 내 죽음은 복수될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1894년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산토 제로니모 카세리오(Santo JeronimoCaserio)가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Sadi Carnot)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크로포트킨 등은 불가능한 상황에 필사적으로 대응하는 등의 행동을 변명하려 했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주장은 대중의 반발을 잠재울 수 없었다. 작가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는 '잠자기 전에 카페에 맥주를 마시러 온 평화로운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에밀 앙리가 설명할 수 없는 폭탄을 던졌을 때 아나키즘 필멸의 적이 에밀 앙리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테러의 반대편에 있던 아니키즘 예술

구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오르낭의 매장」. 사진=위키미디어 

테러리스트 행위가 프랑스에서 아나키즘의 가장 추하고 가장 파괴적인 면을 보여주는 동안, 그것은 또한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가장 창의적인 형태로 많은 예술가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프루동의 친구였다. 쿠르베는 예술은 도덕적, 사회적 목적을 가져야 하며, 우리 종을 물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연과 우리 자신을 이상주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묘사했으며 결국 사회적 리얼리즘 이론에 기여했다. 쿠르베는 그의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에서 낭만주의의 이상을 부정하고 개인의 해방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는 코뮌의 일원이 되어 예술 정책을 책임졌다. 그 결과 그는 나폴레옹의 군사 독재의 상징인 파리의 방돔 기둥을 철거하기로 한 결정에 참여했다.

많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아나키즘에서 예술적 자유,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반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발견했다.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그의 아들 루시앙(Lucien)은 장 그라브(Jean Grave)의 <신시대>(Les Temps Nouveaux) 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쿠르베처럼 피사로는 코뮌 이후 추방되었고 1894년 카르노 대통령 암살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박해를 피해 벨기에로 이주해야 했다. 결국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폴 시냑(Paul Signac)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아나키스트 화가는 아나키스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윤을 고려하지 않고 보상에 대한 열망 없이 부르주아와 관례에 맞서 자신의 모든 개성과 개인적인 노력으로 투쟁하는 사람이다.” 스탕랑(Steinlen)과 이후의 블라망크(Vlaminck)와 다른 야수파 예술가들도 <신시대>에 기고했다. 

장 마리 귀요. 사진=위키미디어
장 마리 귀요. 사진=위키미디어

크로포트킨에게 큰 감명을 준 젊은 프랑스 철학자 장 마리 귀요(Jean-Marie Guyau, 1854~1888)는 그의 「의무와 제재가 없는 도덕의 고찰」(Esquisse d'une morale sans obligation ni sanction, 1884)에서 모든 외부적인 의무와 강제로부터 자유로운 도덕관을 제시했다. 귀요는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우리 자신의 도덕을 창조한다고 주장하면서 공리주의적 계산과 형이상학적 제재를 거부했다. 그러나 슈티르너, 니체와 달리 그는 에고이틱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 보존 본능을 넘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타주의는 충만하고 강렬하며 생산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기초한다. 귀요는 34세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러한 통찰력을 개발할 수 없었지만 크로포트킨은 그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아나키스트라고 느꼈다. 

드가(Degas)가 '화염광의 소방관'이라고 부른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는 크로포트킨(Kropotkin), 톨스토이(Tolstoy), 엘리제 르클뤼(Elisee Reclus)를 읽고 아나키즘에 빠졌다. 그의 화려한 소설은 종종 그가 정죄하는 바로 그 악덕에 매료되며 그의 영웅은 나른한 반역자이다. 예수회 교육으로 트라우마에 빠진 한 젊은이에 대한 연구인 초기 작품 「세바스찬 로크」(Sebastien Roch)에서 사제와 경찰이 운영하는 숨 막히는 체제에 반란을 일으킬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드레퓌스(Dreyfus)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고통의 정원」(Le Jardin des supplices)은 서구 부패와 합법화된 고문에 대한 동양적 비유를 제공하는 반면, 최근에 영화로 성공한 「하녀의 일기」(Le journal d'unefemme de chambre, 1900)는 주로 악덕에 의해 결속된 부르주아지를 보여준다. 평생 군사주의에 반대한 그의 1880년대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예리했다. “폭탄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이 유발하는 어리석음의 폭발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라바콜을 '햇빛과 평화로운 하늘의 기쁨을 잇는 천둥의 소리'라고 묘사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예술과 아나키즘의 혼합, 다다이즘의 탄생

세기 전환기의 아나키즘은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보헤미안적 개인주의자들을 끌어들였고, 잠시 동안 그것은 광범위한 문화적 운동이 되어 광범위한 사회적 환멸과 예술적 반항을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 이론을 탐구하는 것보다 부르주아 관습을 공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니체의 영향을 받은 모리스 바레스는 반사회적 개인주의를 표방한 일련의 장편소설 『모이의 숭배』(L'Ennemides lois)를 썼다. 그것은 생시몽, 푸리에, 마르크스를 공부하고 아나키스트가 된 주인공들이 세련된 관능과 실천을 연마하기 위해 시골로 도피하는 모습을 그린다. 장 그라브는 이것이 현존하는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백만장자에게만 적합한 아나키즘이라고 선언했다. 

마르셀 뒤샹은 프랑스 다다이즘의 중짐이 되는 인물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제1차대전 중 후고 볼(Hugo Ball)과 리햐르트 휠센벡(Richard Huelsenbeck)을 포함한 예술가, 평화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 취리히에 모여 예술과 아나키가 독특하게 혼합된 다다운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주장했지만 전통적으로는 자유영혼이라는 중세적 이단의 전통에 서 있었다. 다다는 예술을 통해 사회 질서 전체를 파괴하고 예술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파리 다다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많은 다다이스트들이 1918년 베를린 봉기에 참여했고, 급진적 공산주의와 점진적인 실업에 기초한 다다이스트 혁명가 중앙 의회를 요구했다. 트리스탄 짜라는 스탈린주의자가 되었지만 다다주의는 1920년대에 프랑스에서 발전한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1925년 '교도소를 열라! 군대를 해산하라!' '사회적 강압이 그 시대를 맞았다. 아무것도 ...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라는 선언에서 볼 수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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