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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떠나는 '엄마 리더' 앙겔라 메르켈
[글로컬 오디세이] 떠나는 '엄마 리더' 앙겔라 메르켈
  • 신상우
  • 승인 2021.12.23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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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신상우 한국외대 EU연구소 선임연구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2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연방군의 고별 열병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1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8일 공식 퇴임한 그는 이날 총리로서 사실상 마지막 연단에 올라 증오와 폭력, 가짜정보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사진=베를린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2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열린 연방군의 고별 열병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1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지난 8일 공식 퇴임한 그는 이날 총리로서 사실상 마지막 연단에 올라 증오와 폭력, 가짜정보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사진=베를린AP·연합뉴스

독일에는 기독민주당(CDU), 독일과 유럽을 변화시킨 기록적인 여성이 존재하며, 이 여성을 사람들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라 부른다. 메르켈은 총리 16년, 하원의원 직속 7석, 연방의회 선거 4회 승리 등 오랜 기간 정치인으로서 사랑받은 인물이다.

메르켈은 1954년 7월 17일 서독 함부르크 루터교 목사인 호르스트 카스너(Horst Kasner)와 라틴어 교사인 헤어린트 카스너(Herlind Kasner)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나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Angela Dorothea Kasner)로 이름이 지어졌다. 가족은 처음 함부르크에서 퀴초(Quitzow)를 거쳐, 1957년 동독 브란덴부르크주 템플린(Templin)으로 이사했다.

메르켈은 사회주의 국가와 기독교적 가치관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73년 템플린에서 최고 점수로 졸업시험(Abitur)을 통과한 후 라이프치히대에서 물리학을 시작했다. 메르켈이 물리학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당시 동독 지도부가 대학에서 자연법칙(Naturgesetz)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메르켈은 의도적으로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을 선택하게 되었다.

동독과 사회주의의 특성은 메르켈에게도 닥쳐왔다. 당시 메르켈은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의 끊임없는 입당 요구와 반체제 인사 감시와 탄압 등을 주요 임무로 활동하는 슈타지(Stasi)의 협력을 거절했다. 동독 출신 정치가 중 상당수는 슈타지와 어쩔 수 없는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고, 이와 같은 사실은 통일 후 독일 사회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당연히 독일 국민들은 슈타지에 협력한 정치인들에 대하여 분노했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그러나 메르켈의 행동은 후에 동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커리어에 손상을 받지 않고 통일 독일의 정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통일 독일과 새로운 가능성은 메르켈의 호기심과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10월 메르켈은 ‘민주주의 각성(Demokratischer Aufbruch, DA)’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DA는 ‘민주주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동독의 정치적 반대 세력의 일부로 등장한다. 1990년 8월 DA는 구동독 최고인민회의에서 CDU와 의회 그룹을 형성하고, 1990년 10월 서독 CDU와 합병하게 된다. 이때 메르켈은 동독의 메지에르(Maiziere) 정부 아래 대변인이 되었고, 독일 통일 과정에 긴밀히 동행하였다.
1990년 12월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메르켈은 1991년 1월 헬무트 콜(Helmut Kohl) 내각에서 여성·청소년 연방 장관으로 지명된다. 당시 콜은 과거 동독 정권과 협력하지 않은 전 동독 출신의 정치인을 필요로 했고,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콜은 통일 독일에서 메르켈에게 장관직을 직접 수여하였다. 경험이 부족한 메르켈은 동독 정치인으로서 할당량이 아닌, 자신이 적합하고 나아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빠르게 증명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1998년 메르켈은 CDU 사무총장으로서 정상에 오르게 된다. 당시 메르켈은 연방 총리인 콜과 정치적으로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콜의 소녀(Kohls Madchen)"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1999년 비자금 스캔들로 인하여 콜과 작별하게 된다. 당시 메르켈이 1999년 12월 22일 프랑크푸르트 신문(FAZ)에 기고한 기사에 의하면, “자신의 당에 늙은 군마가 존재하며, 늙은 군마 없이 정치적 반대 세력과 싸움을 시작하라. 늙은 군마는 당에 해를 끼쳤고 미래는 진정한 토대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으며, 당은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요청하였다.

메르켈은 독일 총리로서 임기를 시작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그다지 큰 위기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2011년 아랍의 봄을 기점으로 유럽 주변에 크림 위기, 브렉시트, 터키 에르도안 정부의 급격한 친동구권 독재 정책 등은 대외적인 정치적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만들었다. 특히 메르켈의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난민 문제였다. 메르켈은 도덕적이고 인도적인 행동으로 난민을 수용하면서 엄마 리더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장기화된 내전으로 지속적인 난민의 유입은 당과 국가를 시험대에 오르게 했고, 우익 세력의 확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오늘날 메르켈 시대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포브스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타임지가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인물인 메르켈의 능력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힘’이었다. 과묵하고 참을성 있는 메르켈은 이견을 듣고 조율하고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 같은 힘은 메르켈이 독일은 물론 유럽을 이끄는 자유주의 지도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리더십의 핵심이기도 하다.

 

신상우 한국외대 EU연구소 선임연구원

독일 마르틴 루터대에서 법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은 「독일의 외국인 투자 심사제도 및 시사점」(2020), 「독일 탈석탄정책과 시사점」(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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