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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명이 우스꽝스러우면 부동산 가격은 저렴하다
도로명이 우스꽝스러우면 부동산 가격은 저렴하다
  • 유무수
  • 승인 2021.12.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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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주소 이야기』 디어드라 마스크 지음 |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496쪽

주소 부여받은 빈민촌 주민은 정체성 갖기 시작해
한국에서 도로명 개편할 때 시민참여는 왜 없었나

이 책은 아일랜드 서부에 살던 저자가 미국에 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됐다. 문득 국제우편료 체계가 궁금했고 만국우편연합(IPU)이라는 국제우편기구를 알게 되었다. IPU는 주소 붙여주기가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빈곤 구제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는 1991년까지 소도시를 제외하면 도로명 주소가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우편물에는 ‘에든버러, 케노게이트 위쪽 골목길 아래, 나의 동생 진에게’와 같은 수신자 주소가 있었고 우체국 직원들의 업무에 부담을 주었다. 카운티는 도로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추진했고, 지역 역사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자기 집 앞 도로를 ‘스튜피드 웨이(Stupid way)’로 짓겠다는 주민도 있었다. 그 주민은 도로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영국에서 집을 구할 때였다. 집은 마음에 들었지만 ‘블랙보이 레인’이라는 도로명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저자에게 흑인노예의 역사를 떠올리게 했고, 결국 다른 곳의 집을 선택했다. 스페인에서는 깊은 신앙심이 있어서 종교도로명 지역을 선택한 것인지, 종교도로명 지역에 살다보니 신앙심이 깊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종교도로명 지역의 거주자들이 대체로 신앙심이 더 깊다. 

영국에서는 킹 또는 프린스가 붙은 거리의 주택 가격이 비싼 편이다. 도로명이 우스꽝스러운 지역의 부동산은 인근지역에 비해 20퍼센트 저렴하다. 의도치 않게 저속한 이름이 붙여진 경우도 있다. ‘백사이드(backside, 엉덩이) 레인’은 마을 뒷길이라서, ‘어퍼 송(upper thong, 위쪽 큰 팬티) 스트리트’는 길고 좁은 모양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2018년에는 ‘벨 엔드(Bell End)’라는 도로명을 개정해달라는 주민의 요구가 있었다. 영국에서 ‘벨 엔드’는 음경의 끝을 의미하기에 그 거리에 사는 아이들이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의 도널드 트럼프는 주소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을 할 때, 좋지 않은 위치도 광고와 심리작전으로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뉴욕에서는 주소의 양도·매매가 가능하다. 건물이 실제로 ‘파크 에버뉴’에 있지 않아도 주소에 그 이름이 들어가면 가격이 올라간다. 대신 신고를 받은 경찰이나 소방서에서 제대로 찾아가기 어려운 부작용이 있다. 저자는 한국에서 도로명을 개편할 때 시민참여를 독려하거나 한국문화를 반영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논리적이고 진부한 방식으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개편작업에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희망재단’은 인도 콜카타에서 ‘주소 없는 이들에게 주소 만들어주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 지역의 빈민촌에는 주소가 없다. 주소가 없으면 은행계좌를 개설하지 못하고, 저축도 못하고, 정부의 공공서비스 혜택도 받지 못한다.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해 굶어죽는 사람도 많다. 주정부는 빈민촌에 주소를 부여하면 합법성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에 주소부여에 적극적이지 않다. 주소는 도로명 만들기에서 시작됐고 주민이 확고한 정체성 의식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된 이름은 복합적인 의미의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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