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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수와 대비해 ‘금강산’ 절경을 나타내다
중국 산수와 대비해 ‘금강산’ 절경을 나타내다
  • 박종훈
  • 승인 2021.12.31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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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유람기 영악록』 정윤영 지음 | 박종훈 옮김 | 도서출판 수류화개 | 272쪽

총 51일 1천70리 여정을 1만7천956자에 담아내다
혼란한 시대에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유람기에 투영

이 책은 금강산 유기(遊記)로 조선 후기 정윤영(鄭胤永, 1833~1898)의 기록을 탈초·번역한 것이다. 정윤영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이다. 정윤영은 65세이던 1897년 8월 16일 경기도 안성을 출발하여 10월 8일 귀향할 때까지의 총 51일 1천70리 여정을 『영악록』에 담아냈는데, 글자 수는 총 1만7천956자이다.

 

『영악록』의 특징 중 하나는 전대(前代) 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을 대폭 수용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김창협(金昌協)의 『동유기(東游記)』와는 그 체제나 실제 내용에서 유사한 측면이 대단히 많다. 『동유기』를 의식한 상태에서, 짧은 구절 혹은 전체 대목을 그대로 옮겨왔을 뿐만 아니라 여정이나 풍경점에 대한 기록 그리고 감회 부분까지 가감 없이 수용했다. 이를 통해 김창협의 『동유기』를 당대 문인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했는지에 대한 일단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남효온(南孝溫), 오도일(吳道一), 이의현(李宜顯), 홍경모(洪敬謨) 등의 기록도 일정 부분 수용했다.

『영악록』에는 조선 문인들의 금강산 관련 기록에 대한 언급보다 오히려 산수 유람과 관련된 중국의 기록이 더욱 방대하다. 『삼재도회(三才圖會)』, 『수경주(水經注)』, 『열선전(列仙傳)』의 기록을 비롯하여 공치규(孔稚珪), 도홍경(陶弘景), 두보(杜甫), 범성대(范成大), 오도현(吳道玄), 오정간(吳廷簡), 왕발(王勃), 왕세정(王世貞), 왕운(王惲), 원굉도(袁宏道), 유종원(柳宗元), 이반용(李攀龍), 이백(李白), 한유(韓愈) 등의 중국 산수에 대한 언급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문인의 기록은 대부분 여정을 기록하거나 그 여정에서 본 풍경을 묘사하는 대목에 반영된 반면, 중국의 기록은 각 구간에서의 유람이 끝난 후에 그 구간에서의 정회를 서술하는 대목에 집중되어 있다. 금강산의 각 풍경점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 중국 기록을 활용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산의 절경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중국 산수와의 대비를 통해 금강산이 비교 우위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종래의 금강산 유기와 변별되는 『영악록』만의 독특한 서술 방식이다.

 

동국의 산수 유람 습속에 대한 비판

『영악록』에는 산수를 대하는 정윤영만의 견해도 곳곳이 산재한다. 정윤영은 명(明)나라 원굉도(袁宏道)가 “법률(法律)에 산의 재목을 도둑질하거나 광물(鑛物)을 채굴하면 모두 일정한 형벌이 있는데, 세속의 선비가 명산(名山)을 더럽히는 것은 법률로 금하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청산의 흰 바위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무 까닭 없이 그 얼굴에 묵형(墨刑)을 가하고 그 피부를 찢는단 말인가. 아, 매우 인(仁)하지 못하도다”라고 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바 있다. 산에 들어와 암석이나 절벽에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에 대해서는 형벌이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행위가 산에게는 불인(不仁)한 처사가 된다는 논조로, 동국(東國)의 유람 습속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이외에도 게판(揭板)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자 한 습속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 바 있다.

1881년 개화를 반대하는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경기도에서는 같은 해 4월 유기영(柳冀永)을 소수(疏首)로, 6월에는 신섭(申㰔)을 소수로 두 차례 소장을 올렸다. 두 소장을 모두 정윤영이 윤색(潤色)했는데, 이로 인해 함경도 이원현(利原縣)으로 배소(配所)가 결정되었고 1883년 1월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바 있다. 

『영악록』에는 척사를 주장했던 당대 유자(儒者)의 삶의 모습도 오롯이 담겨 있다. 금강산 유람을 평소 익혔던 유자적 사유에 대해 현실 공간에서 체득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고, 척사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재확인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마치 한편의 자서전처럼 자신의 삶을 곳곳마다 투영시켜 혼란한 시대에 올곧은 자세로 살아왔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는데, 이러한 부분 역시 여타의 유람기에서 볼 수 없는 『영악록』만의 특징이다.
정윤영 『영악록』의 번역 출판을 통해 금강산 유기와 금강산 표상의 편폭이 넓어지길 기대한다.

 

박종훈
조선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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