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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씨의 죽음
존버씨의 죽음
  • 최승우
  • 승인 2022.01.17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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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지음 | 오월의봄 | 364쪽

존버씨의 죽음,
과로+성과체제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살인

“카드사에서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던 중 IT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택배 기사 임모씨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서울시청 공무원이 투신자살했다.” “집배 노동자가 목을 매 자살했다.” “경마장 기수가 자신의 차량에 불을 피워 자살했다.” ……
어제까지 버젓이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왜 죽었을까?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분명 업무와 관련된 죽음인데, 그들의 죽음은 왜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의 일터는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었을까?
우리 시대 존버씨가 죽어가고 있다. 오늘도 버티고 또 버텨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버씨. 존버씨는 노동의 고통과 비참에 시달리는 김알바, 김인턴, 김사원, 김대리, 김과장과 다르지 않은 이름이다.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과로+성과체제에서 존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과로위험과 성과 압박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 모두가 바로 존버씨다. “과노동에 존버하다 스러져간 망자만이 존버씨가 아니다. 오늘을 존버하는 남겨진 나와 우리 또한 존버씨다.”(7쪽)
이 책 《존버씨의 죽음》은 존버씨의 과로죽음과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된 우리 일터의 현실을 추적한다. 사회학자 김영선은 오랫동안 과로에 얽혀 있는 일상 이야기를 소재 삼아 우리네 삶의 시간성을 연구해왔다. 전작 《과로 사회》(2013)에서 한국 사회를 ‘과로 사회’로 규정하고, 장시간 노동의 일상 풍경을 파헤쳐 많은 주목을 받았다.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2018)에서는 과로가 유발하는 신체적, 정신적, 관계적, 사회적 질병을 ‘시간마름병’이라고 진단하며, 과로가 우리의 몸과 마음, 삶과 미래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했다.
이 책 《존버씨의 죽음》에서는 본격적으로 과로죽음(과로사·과로자살) 문제를 다룬다. 과로죽음의 ‘과로’를 조명해 과로죽음이 과로+성과체제가 불러일으킨 필연적인 죽음이며, 사회적 타살임을 분명히 밝힌다(과로+성과체제란 과로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경쟁적인 성과체제가 덧대진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가 만든 개념이다). 즉 존버씨의 과로죽음은 단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가 교차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임을 명확히 규명한다. 이 과로죽음이 반복해 발생하는데도, 왜 과로죽음에서 ‘과로’는 누락되는지 그 원인을 살펴본다.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가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를 밝힌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과로+성과체제가 야기하는 사회적 살인을 규명하고 그동안 개념조차 없었던 과로죽음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혹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일하는 건 아닐까?”라고 고민하는 우리 시대 존버씨의 삶을 반추해보며, 과로와 죽음의 거리를 멀어 보이게 하는 자본주의적 담론/장치에 어떻게 균열을 낼지 고민하는 책이다.

존버씨의 목소리,
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죽어가는 삶’을 사는가?

1장은 왜 존버씨의 시간을 다뤄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견디고 버틸 것을 요구하는 노동의 세계에서 우리 존버씨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노동시간이 세계 최고에 달하는 작금의 과로체제에서 무엇이 존버씨를 죽음으로 내모는가? 왜 우리의 일터는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나다운 삶,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가? ‘살아가는’ 삶이 아닌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로죽음에 얽힌 존버씨의 목소리를 읽는다.

2장은 금융 노동자, IT 노동자, 경마기수, 집배원 등의 과로죽음 사건을 다룬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고통의 시스템을 샅샅이 해부한다.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된 우리 시대 일터의 현실을 분석한다. 특히 각 업계에서 쓰이는 은어들(크런치 모드, 콜수, 밥값, 욕값, 분급, 경쟁성 상금, 실시간 UPH, 순증, 겸배)을 통해 각종 경쟁적인 성과 장치와 자살 감정 간의 상관성을 탐색한다. 프로세스는 혁신적이지만, 조직문화는 여전히 낡았고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갖은 어려움도 드러낸다. 왜 과로죽음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를 추적한다. 특히 과로죽음이 반복돼 나타나는 우정사업본부와 부산경남경마공원의 실태를 집중 분석한다. “반복된 자살은 여러 면에서 기이하다. 우선, 한 곳에서의 자살률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일반 인구의 자살 십만인율과 비교해도 그렇고 일반 기업의 자살률에 비해서도 상당한 정도다. ‘여가선용’의 장소가 아니라 ‘죽음의 장소’라 일컬을 만하다.”(89쪽) 그리고 과로죽음 사건이 반복됨에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방조되고 무관심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과로죽음은 과로+성과체제가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부정의의 산물임을 밝힌다.

3장은 재난 상황에서 발생하는 과로죽음을 다룬다. 재난이 발생하면 최전선으로 뛰어가야 하는 재난 노동자들이 있다. ‘비상 상황’은 이들을 사명감, 책임감, 직업정신으로 포장해 동원한다. 그들에게는 위험 업무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희생, 헌신 등 재난 이후 출몰하는 수많은 마법의 언어가 어떻게 과로죽음과 연결되는지를 분석한다. 과로위험을 특정 집단에 전가하는 방식은 불평등을 심화하는 재난 대응책임을 지적하고, 재난 대응의 첫걸음은 인권 관점에서 이뤄져야 함을 강조한다. “재난을 ‘예기치 못한 것’으로 여기고 ‘희생과 사명감’을 동원하는 방식의 대응은 적절치 못하다. ‘언제라도 맞닥뜨릴 수’ 있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이 ‘반복’될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 원칙이 요청된다.”(214쪽)
업무 관련한 자살이 산재 인정을 받으려면 자살이 정신 이상 상태에서 발생한 것임을 밝혀야 하고 그 정신 이상 상태가 업무와 관련되었음을 밝혀야 한다.

4장은 산재 판정의 승인 케이스와 불승인 케이스를 대상으로 승인 또는 불승인의 근거로 표현되는 언어를 비교한다. 판정 사례를 보면 승인/불승인의 경계가 그리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상적인’이란 표현이 대표적이다. 자의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발견된다. 우울증은 다른 모든 요인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작용해 불승인의 근거로 설명되는 경우도 잦다. 이는 과로사·과로자살에 대한 공통의 사회적 언어가 부재한 데서 빚어지는 문제적 양상이 아닌가 싶다.

5장은 현재의 시간구조를 반추하고 건강한 시간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펴본다. 세계의 흐름은 노동시간의 단축 경향이 아니라 오히려 과노동이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도 마찬가지다. 구속력이 약한 노동기준법 등 법제도 요인 이외에 세계화, 정보통신혁명, 소비자본주의, 노동의 규제완화가 과노동을 야기하는 원인임을 밝힌다. 노동시간 개선책,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과 관련해 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늘 반영되지 않는지도 탐색한다. 과로+성과체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그 대안도 고민해본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EU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하지만 과로에 대한 한국인의 주관적 인식은 EU 국가에 비해 상당히 낮다. 일에 투여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음에도 이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는 무감각 상태에 이른 것이다. 낯설게 바라보고 거리 두기 해야 할 대상은 과로+성과체제 그 자체다.”(267쪽)

노동 VS 자본,
과로죽음이란 무엇인가?

과로죽음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돌연사(과로사)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과로자살)를 말한다. 그렇지만 과로죽음에 대한 실태 파악은 전무한 상태이고, 사회적 사실을 담아내는 개념이나 법제도가 부재한 실정이다. 아직까지 과로죽음은 “언어 없는 사건, 개념 없는 현상”일 뿐이다. 이 책은 이런 과로죽음에 개념과 언어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과로죽음을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치열하지만 개념과 언어의 부재로 노동과 자본은 이내 곧 소통 불가능한 전쟁 상태에 이른다. 죽음을 둘러싼 각축에서 노동은 사회적 타살, ‘살인적인’ ‘비정상적인’ 노동시간, 현대판 노예제, 인력 충원, 업무 연관성을 지목하고 강조한다. 반면 자본은 연관성 없음, 사실과 다름, 통상적인 수준, 견딜 만한 정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과중한 업무는 아님, 효율과 유연화, 인력 재배치를 설파하고 내세운다.”(8쪽)
저자는 과로죽음에 대한 사회적 설득과 공감을 담아낸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로죽음은 제대로 규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로죽음은 분명 ‘사회적 타살’이고, 자주 반복되지만 그 죽음을 놓고 많은 경우 개인적인 것,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것, 갑작스런 일로 처리되기 일쑤다. 문제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의외로 강력한 프레임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이런 개인 탓을 내면화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다. 이 같은 현상은 과로+성과체제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존버씨의 절망,
과로죽음에서 ‘과로’는 왜 누락되는가?

“과로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이지만 사회·조직의 구조적 모순을 담지한다는 의미에서 집합적인 비극이다. 지금 이 시대 노동자가 어떻게 취급받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거울이다.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한 비상 상황, 절망 상태를 나타내는 사회적인 사실이다. 그렇지만 과로죽음을 개인적인 비극으로 보는 시각이 꽤 많다. 이런 시각은 왜 많은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그 자체로 따져 물어야 할 연구 대상이다.”(24쪽)
과로죽음이 반복해 발생하고 있다. 돌연사하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일어난다. 부산경남경마공원, 우정사업본부 등과 같은 곳에서는 반복해 일어나기도 했다. IT 노동자, 금융 노동자, 택배 노동자, 물류 노동자 등의 자살 사건도 반복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이 과로죽음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크다. “평소 건강관리를 못 해서” “정신 상태가 글러먹어서” “원래 아픈 데가 있어서”와 같이 개인의 취약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언어로 노동자의 죽음을 묘사한다. 이렇게 되면 일터에서 일어난 구조적인 모순은 드러나지 않게 되고, 사망 원인은 ‘개인의 취약성’에 맞춰지게 된다.
이런 과로죽음을 거리로 표현해보면, 과로와 죽음 간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꽤 멀다. 가까운 이유는 과로죽음은 과로+성과체제에서 반복되는 사건으로 꽤 일반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사건이다. 그 역사가 오래된 점도 그렇고 최근 더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거리는 꽤 멀다. 죽음과 업무와의 연관성을 분리하려는 언어, 담론, 장치, 권력이 꽤 촘촘하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면서 과로죽음에서 과로를 떼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음을 유발하는 노동조건은 은폐되고 과로죽음은 취약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지만 여러 죽음 사건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과로죽음이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이다.
또한 과로자살에서 과로의 누락은 자살 예방 정책에서도 발견된다. 개념이 부재하고 정책이 부재한 탓에 과로자살 사건은 우울을 유발하는 구조 대신에 우울을 앓는 개인에 방점이 찍히고, 이에 대한 대안은 괴롭힘 방지나 착취 근절 같은 집합적 해법이 아니라 마음 치유나 정신 상담, 심리 치료 같은 개인 단위의 해법에만 집중된다.

존버씨의 탈출 혹은 저항,
“더는 이렇게 취급받을 수 없다”

“한 달에 많이 서면 12번의 당직을 섭니다. 이게 어찌 사람 사는 일입니까. …… 이제 조금은 쉬어야겠네요.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많은 노력을 했는데, 너무 많이 힘들어 이제는 내려놓을려구요.”(부산경남경마공원 말관리사 유서, 88쪽)
존버씨의 과로죽음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특히 실적 압박의 폭력성이 노동자들을 불안감+쥐어짜임+타들어감+짓눌림+무력감+고립감 상태로 내몰아 자살 감정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는 과로자살 사건을 보면 볼수록 선명해지는 공통점이다.
그렇다고 존버씨의 과로자살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더는 이렇게 취급받을 수 없다”와 같은 분노가 담긴 행위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행복 없이 살아가는 삶, ‘살아가는’ 삶이 아닌 ‘죽어가는’ 삶에 대한 탈출행위 혹은 저항행위로서 말이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신 비참과 작별하겠다는 실천인 것이다. 이같이 읽으려는 이유는 자살 행동의 많은 경우는 문제, 딜레마, 고통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몸부림, 고민, 소통, 각오, 계획, 시도이기 때문이다. 자살이 통상 우울증, 무기력, 무력감, 정신적 이상 상태로만 편향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함이다.”(25쪽) 과로자살은 일터에서의 인간적 삶이 불가능한 비상 상태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더는 이렇게는 취급당하지 않겠다’는 존버씨의 비극적 저항의 표식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로죽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된 일터

과로죽음은 지금 이 시대 노동자가 얼마나 막 취급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존버씨의 과로의 성질도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건강 문제의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착취의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 발전주의 시대 노동시간은 작업장 안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작업장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이전에는 근면하게 일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넣으면 됐지만 지금은 정신과 영혼을 연료로 태우는 식의 압박이 이루어진다. 질식할 것 같은 경쟁 시스템, 성과 압박이 작동되는 세계에서 존버씨는 끊임없이 정신적 고통을 당해야 한다. 최근 들어 과노동과 실적 압박을 이유로 과로죽음이 늘어나는 이유다. 작금의 과로죽음은 발전국가 시기 이후 만성화된 과로위험에 신자유주의적 성과 장치, 기술 장치 같은 새로운 위험 요인이 덧대지면서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과로죽음의 유형으로는 게임이나 IT, 방송, 웹툰과 같이 문화콘텐츠를 제작하는 노동자의 과로죽음이나 보험·증권 등 금융 노동자나 방문판매관리 노동자의 과로죽음, 로켓배송·샛별배송 같은 야간노동+불안정노동에 따른 택배·물류 노동자의 과로죽음을 들 수 있다. 산재 인정 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시간임에도 실적 압박이나 마감 압박, 집중 근무, 야간노동 같은 업무의 질적 요인에 따른 과로죽음 사례다. 핵심은 ‘분초 단위로’ ‘더욱 높아지는’ 그래서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실적 압박·성과 평가 등의 개별화하는 경쟁 장치가 턱밑까지 차오른 과로죽음의 위험을 ‘격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과로죽음을 발전주의 시대의 과로죽음과 구별해 다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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